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산하 기관장을 쫓아내려 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는 가운데,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은 새 정부의 사퇴 압박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임기가 보장된 권익위원장에게 물러나라고 압박한 이를 검찰이 수사하지 않는 것은 수사의 일관성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니 결국 정치보복이라는 것이다. 정치보복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한참 동안 논쟁이 되겠지만, 정쟁을 떠나 보다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공공기관장 자리가 국민을 위한 자리인가, 정권을 위한 자리인가? 정권을 위한 자리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싹 물갈이해도 그만이지만, 국민을 위한 자리라면 애초에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이에게 자리를 맡기고 권력 눈치를 보지 않도록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 아마 이 질문을 받은 일반 국민이라면 백의 백 ‘국민을 위한 자리’라 대답할 것이다. 실세 권력들의 개인 주머니에서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국민 세금으로 유지되는 자리이니 당연하다. 정무직과 달리 애초에 기관장의 임기를 관련법에 박아놓은 것 자체가 그런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지키지도 않을 임기를 법에 박아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런데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이 무색하게도,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일관성이 없고, 법 규정과 실제 운영은 표리부동하다. 요즘 다수 언론은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인사들이 임기에 기대 자리를 지키는 것에 대해 힐난조다. 방송통신위원장, 권익위원장처럼 권력 유지를 위해 중요한 도구라 인식되는 자리, 정부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국책연구원장, 탈원전이나 4대강 사업처럼 정권의 브랜드 사업을 앞서 집행하는 공기업 사장 중 상당수가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며 질책하는 언론이 한둘이 아니며, 그런 기사가 딱히 지탄받지도 않는다. ‘공공기관장은 새 정권이 나눠 갖는 자리’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정권 초기 대선캠프 인사들의 자리를 챙겨줘야 한다는 말에 박근혜 대통령이 ‘이러려고 절 도우셨어요?’라고 면박 줬다는 일화는 ‘공사 구분’이 아니라 ‘정치현실을 무시한 비현실적 감각’이라는 냉소적 맥락에서 회자됐을 정도다. 물론 코드인사로 자리를 차지한 이들의 질이 너무 낮으니 때 되면 물러나야 한다는 인식도 일리가 있지만, 당선에 도움 받았다는 사적인 지분을 공적인 자리로 보답하는 후진적 관행을 우리 사회가 당연시한다는 것이 본질이다.
그런데 법 규정은 공모 절차로 뽑는 능력 인사를 명시하고 있지만 사실은 권력실세가 내리꽂으니, 모든 과정이 비밀이 돼 어떤 견제도 안 받는다. 아예 일부 관직을 정권의 전리품으로 취급하는 엽관제를 채택한 미국도 그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투명성을 내장하는 데 비해 우리는 아예 낙하산인 걸 숨기고 부정할 수 있으니, 정말 마음 편하게,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은 낙하산 인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실 권력실세와의 친분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이들이 혈세로 운영되는 350여 개의 공공기관 책임자로 입성해 임기 내내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정권 나팔수 역할을 하다가 정권이 바뀌면 알박기에 돌입해 버티는 것은 너무 큰 국가적 낭비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기관장들이 사퇴 압력을 받는 것이 지난 수십 년간의 공공연한 관행인데도 정권 교체기마다 새삼 직권남용이네 정치보복이네 시비가 되풀이되는 것 역시 낯 뜨겁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핵심은 현실과 이상의 균형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차피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나눠주는 논공행상의 근절은 한동안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잿밥’을 바라지 않고 대통령 후보의 능력과 철학에 매료돼 선거 캠프에 참여하는 이는 드물다. 공적인 마음자세가 갖춰져 있지 않은 이들이 대선 캠프에 부나방처럼 몰려들고, 그런 잿밥나방 내지 홍위병들을 다음 선거와 순조로운 정국운영을 위한 필수 자산으로 여겨 자리로 보상하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부적절 인사에 대한 언론의 감시와 견제도 미미해, 공직자에게 공적인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빠른 시일 내에 바뀔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공적 헌신을 전제로 제도를 설계해봤자 법 규정의 사문화와 ‘무견제 측근인사’밖에 안 나온다는 것이다.
일단 이 점을 인정하면 차라리 낙하산의 품질을 개선해 ‘정권을 위한 자리’와 ‘국민을 위한 자리’ 간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논공행상이라도 최소한의 눈치는 보도록, 최대한 성의 있게 하도록 견제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우선 추천의 책임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추천위원회 등 모양만 그럴싸할 뿐 사실상 책임소재를 뭉개는 공모절차 규정을 대폭 개정해 추천 경로를 ‘담당부처 장관’으로 명시하자.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실 실세가 사람을 꽂더라도 자기 대신 장관이 공식적인 책임을 진다면 아무나 꽂는 것을 자제하고 의논할 수밖에 없다.
기관장 임기도 대통령 임기에 연동시켜 권력 교체기마다 민망스러운 내로남불 직권남용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 무엇보다 아무나 운영하면서 말아먹어도 되는 기관이라면 굳이 국민 혈세로 이렇게나 많이 유지할 이유가 없다. 불요불급한 공공기관을 없애고 합쳐 논공행상 잔치 규모를 줄이는 것이 공공부문 개혁의 시작이다. 악순환은 이용해먹기보다 끊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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