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은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 선생이 물설고 낯선 이국땅 중국의 상하이에서 순국하신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제국에서 대신(지금의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 관리를 지낸 인사들 가운데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현지에서 돌아가신 유일한 분이다.
그토록 높은 지위에 이르도록 나라의 녹을 받고 살아가다 그 나라가 망했는데 이를 되찾고자 힘쓴 분이 동농 선생 외에 달리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그만큼 동농 선생의 존재는 귀하게 다가온다. 세상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말하는,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동농 선생은 그 이상이었다. 그가 3·1운동 직후 아들 한 분만 대동해 기차편으로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다.
“민국(民國)의 존망 앞에 어찌 이 한 몸 돌볼까/천라지망을 귀신처럼 빠져 나왔네/그 누가 알까? 3등 객차 속 저 나그네/깨진 갓에 누더기(破笠蔽衣) 걸친 옛적의 대신(舊大臣)임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농 선생이 첫머리에 자신의 나라를 ‘민국’이라고 적은 대목이다. 그는 비록 대한제국의 대신이었지만 이제 그의 나라는 ‘대한민국’이었던 것이다. 삼일운동 직후 중국의 상하이에서 새로이 수립된 대한민국이 그가 속한 나라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가 의탁하고자 했던 조직체였던 것이다.
그는 망명 직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나는 이곳에 우리 민족의 정부가 있음을 듣고 왔다”면서 “나는 우리 정부가 있는 이곳에서 죽음이 본래의 생각”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동농 선생의 위대한 점이다. 이미 70줄에 들어선 그 자신은 뼛속 깊이 조선 또는 대한제국의 사람이었지만, 그 연배에 압록강을 건너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시대적 전환을 꿰뚫어 보고 그 역사적 흐름에 겸손히 순응하고자 했던 결과다.
그래서 그는 임시정부에서 ‘국노(國老)’, 즉 대한민국의 원로로 존경받았고, 그가 별세하자 임시정부가 사실상 ‘국장’의 예우로써 장례를 치렀다. 당시 임시정부를 대표해 부고를 낸 7인 중에는 필자의 종조부 이시영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동농 선생이 상하이의 만국공묘에 이승에서의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한 지도 꼭 100년이 된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사이 문화혁명으로 그의 묘는 파괴되고, ‘B119 을혈(乙穴)’이라고 후손들이 적어둔 묘번에 의해 간신히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외양만 보면 인생이 허무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새 나라의 존망에 자신의 모든 것, 즉 재산과 명예와 생명을 모두 걸었지만 과연 그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이냐고. 또 그가 그토록 노심초사했던 대한민국이 이제 세계적 위상을 갖추고 G7을 바라보는 마당에 그 한 몸은 이역만리에서 묘지조차 잃은 채 100년 동안 환국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이제는 동농 선생의 묘소 확인 및 이장 작업을 추진해 그의 유해와 넋이라도 조국으로 모셔야 한다. 그와 함께 그의 면모도 입체적으로 정리되고 평가되기를 기대한다. 그는 내외의 주요 직책을 모두 거쳤지만, 특히 외교관으로서는 세력 균형 속의 동북아 평화와 조선의 국력 신장에 힘쓴, 대단히 실리적이면서도 균형 감각을 갖춘 선각자였다. 그러다 보니 일본으로부터는 친중파로, 중국으로부터는 친러파로, 러시아로부터는 친일파로 각각 매도되고 의심받지 않았던가. 이런 내용을 파편적으로 볼 때 어떻게 정당한 평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동농 선생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가 절실하다.
선생이 대동단의 총재 자격으로 망명한 만큼, 차제에 대동단이 1919년 3∼5월의 거족적 만세운동 불길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며 이를 군사 활동으로 이어가고자 시도했던 양상도 재발견되어야 한다. 또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에 압수된 임시정부 초기 기록들이 발굴되어 선생이 임시정부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도 확인되고 정리되어야 마땅하다.
이 모든 일이 어찌 동농 선생 한 분을 위한 일이겠는가? 이것은 한 세기 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의 우리 역사 가운데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미진한 부분들을 메우고 채우며 바로잡아 나가는 일이다. 후손들의 부족함과 게으름을 고백하며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다음 100년의 기풍을 세워나가는 일이다. 그것이 제국에서 민국으로, 이를 바탕으로 다시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동농 선생의 뜻에도 마땅한 일이 될 것이다.
때마침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도 최근 개관해 우리 헌법상의 법통을 분명히 하는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동농 선생이 ‘대한민국의 원로’로서 말년의 활동을 펼쳤던 그 임시정부를 기리는 장소다. 바로 이곳에서 동농 선생의 올해 추모 행사를 4일 갖게 된 것도 뜻깊은 일이다.
동농 선생의 100주기를 맞아 못난 후세인으로서 이제라도 그의 넋을 고국으로 모실 것을 다짐하며, 새삼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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