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로건서클,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붉은색 건물이 있다. 옛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이다. 이 건물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에서 열강들의 각축전이 벌어지던 1891년. 고종은 특명을 내려 미 국무부 차관의 소유였던 이 건물을 2만5000달러를 들여 매입했다. 1910년 강제병합 직후 일제는 이 건물을 5달러에 빼앗았다. 되찾아오기까지는 102년이 걸렸다. 2012년에야 민관이 힘을 합쳐 이 건물을 다시 사들였고, 6년 뒤 원형대로 복원해서 개관했다.
▷1888년 1월 박정양 주미 공사는 백악관서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국서를 전달했다. 이때 박 공사는 청나라가 요구했던 영약삼단((령,영)約三端·세 가지 별도 약정이라는 뜻)을 어기고 청나라 공사를 배석시키지 않았다. 자주독립 국가로서 당당히 외교권을 행사한 것이다. 박 공사는 미행일기(美行日記)에서 “미국은 민주국으로 예절이 퍽 간편하다”며 세 번의 절 대신 악수로 인사를 나눴던 미 대통령과의 만남을 기록했다.
▷자주외교의 길을 모색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대한제국공사관 6곳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함께 일제히 폐쇄됐다. 주미 공사관을 제외하고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청) 일본 등 해외에 설치됐던 공사관들은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05년 5월 런던의 주영 공사관에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관이었던 이한응 열사가 일제의 주권 침탈에 항거하며 31세 나이로 자결했다. 이 사실이 고국에 보도돼 항일운동에 불을 댕겼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자리에는 임대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905년 12월 주청 공사관의 마지막 보고는 “한국의 일체 외교 교섭 사무는 일본 외무성이 담당한다고 한다”며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 훈시를 내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베이징 톈안먼 동쪽 둥자오민샹(東交民巷)에 있던 주청 공사관 건물은 1915년 철거됐다. 설치 기간이 가장 오랜 주일 공사관 터는 옛 주소와 과거 사진이 남아 있지만 그 위치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현재 우리나라 재외공관은 대사관 116곳을 포함해 모두 167곳이다. 청나라 허락을 받아 공사를 파견하고 일제에 의해 재외공관이 한순간에 폐쇄됐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대한제국공사관의 실태를 조사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조선이 자주국가임을 널리 알리고 근대화를 모색하는 한편으로 외교활동의 거점이 됐던 곳”이라며 “기초 고증연구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망국의 위기에도 주권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던 역사를 기억 속에 남겨야 한다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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