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는 유독 비참한 최후를 맞은 왕이 많다. 그중 성왕의 죽음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외교 역량을 발휘하는 등 ‘영웅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지만, 단 한 번의 판단 착오로 신라군에 사로잡혀 목이 잘렸다. 그 때문에 전륜성왕이 되려던 그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그는 32년간 재위하며 왕권 강화에 매진했다. 관부(官府)를 22개로 세분하고 관리들의 업무를 명확히 하였으며, 벼슬아치들의 위계에 따라 복식의 색깔이나 장식에 차별을 두었다. 그가 추진한 왕권 강화 정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복식품 일부가 여러 유적에서 발굴됐다.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의 복식품으로는 관장식, 귀걸이, 허리띠 장식이 있다. 그중 소유자의 지위가 가장 뚜렷이 반영된 것은 관에 부착하였던 은꽃 장식이다. 이 장식을 두고 학자들이 ‘백제 정치사 해명의 결정적 단서’라고 설명하곤 하는데, 그것에는 백제사의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을까.
학계 주목 못 받았던 ‘은제 장식’
1938년 전남 나주 흥덕리에서 터파기 공사 중 석실묘가 드러나자 주민들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 여러 점의 유물을 들어냈다. 그 가운데 은꽃 장식 하나가 섞여 있었지만 파편이었기에 오랫동안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50년 1월, 충남 부여 하황리 주민들이 구들장으로 쓸 요량에 석실묘의 뚜껑돌을 들어올렸는데, 석실 안에 유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보곤 달려들어 끄집어냈다. 그들은 순금 유물을 논산 금은방에 고가로 팔아치운 다음 나머지를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품 가운데 은꽃 장식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유물은 17년이 지난 뒤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정확한 용도를 몰랐기에 ‘은제 장식’으로 소개됐다.
1967년에는 전북 남원 척문리에서 또 하나의 은꽃 장식이 발견됐다. 한 주민이 자신의 땅을 개간하던 중 석실묘가 드러나자 호기심에 석실 안으로 진입해 몇 점의 토기와 은꽃 장식을 반출했다. 이듬해 이 유물은 학계에 ‘백제의 관 장식구’로 간략히 소개됐다.
1960년대까지 백제 석실묘에서 3점의 은꽃 장식이 발견됐지만, 그것의 성격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백제 은꽃 장식에 비로소 조명이 가해졌다. 학계에서 무령왕릉 출토 금 관식이 중국 역사책에 백제 왕이 썼다고 기록된 ‘금꽃’이고, 석실묘 출토 은 관식이 나솔(奈率) 이상의 백제 관료가 소유하였다고 하는 ‘은꽃’임을 밝힌 것이다.
백제 관료의 권위 보여주는 은꽃 장식
1990년대에 들어서서 부여군은 공설운동장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고도에서 운동장 건립 부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부여군은 곳곳을 탐색하다가 마침내 능산리 능안골의 한 야산을 대상지로 선정했다. 그곳은 백제 왕릉원에서 동북으로 1.6km가량 떨어진 곳인데, 지표에서 유적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최적지라 여긴 것이다.
1994년 겨울,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에 필요한 진입로를 내게 되었다. 포클레인으로 땅을 조금 걷어내자 석실묘 뚜껑돌이 드러났고 때마침 주변을 둘러보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연구원들의 눈에 띄었다. 공사는 즉각 중단되었고 발굴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많아야 석실묘 두세 기 정도가 묻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60여 기의 석실묘가 확인됐다.
특히 조사단의 눈길을 끈 것은 36호분이었다. 머리 부위에서 발견된 삼각형의 철제 뼈대 중간에 은꽃 장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유물이 출토되면서 이 고분군의 위상이 갑자기 높아져 ‘능산리 귀족묘군’으로 불리게 됐다. 발굴이 끝난 후 이 유적에는 보존조치가 내려졌고 부여 주민들의 소망이던 운동장 건설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부여군은 금강 서쪽 나복리에 대체 부지를 확보하였고 발굴조사를 거친 다음 2007년이 되어서야 공설운동장을 준공할 수 있었다.
백제 관료의 권위 보여주는 은꽃 장식
2009년 전북 익산에서 특별한 은꽃 장식 2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백제 무왕 때인 639년에 봉안된 사리장엄구 일괄품이 발굴되었는데, 그 속에 은꽃 장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백제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사리를 모셨다고 하므로 이 장식도 그때 탑 사리공 안에 묻혔음이 분명하다.
은꽃 장식들 가운데 하나는 도안이 복잡하고 다른 하나는 조금 간소하다. 그런데 간소한 것에 수리 흔적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장식의 윗부분이 부러지자 내측에 자그마한 은판을 덧댄 다음 표면에서 2개의 못을 박아 수리한 것이다. 이 장식의 소유자는 백제의 왕족 혹은 귀족이었을 텐데, 왜 새로이 만들지 않고 수리해서 쓴 걸까. 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백제 사회에서 개인이 사사로이 은꽃 장식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2013년 경남 남해 남치리 1호 석실묘에서 백제 은꽃 장식이 출토되었을 때 미륵사지 은꽃 장식이 빛을 발했다. 남치리 출토품의 형태가 미륵사지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남치리 은꽃 장식에 7세기 전반이라는 연대가 부여됐다. 가야 멸망 후 남해는 줄곧 신라 땅으로 여겨졌는데 남치리에서 7세기 전반의 백제 은꽃 장식이 출토됨에 따라 그곳이 그 무렵 백제로 편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14점의 은꽃 장식 가운데 연대가 가장 이른 것은 전남 나주 송제리 1호 석실묘 출토품으로 성왕 재위연간에 제작된 것이다. 은꽃 장식의 분포를 보면 왕도인 부여에 집중하는 경향이 뚜렷하며 지방에서는 논산, 보령, 익산, 남원, 나주, 남해에서 출토되었다. 미륵사지 출토품을 제외하면 도성과 지방의 주요 거점 소재 석실묘에 묻혔다. 은꽃 장식은 은판을 오려 만든 자그마한 관 부속품에 불과하지만, 사비기 백제 관료의 권위를 표상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는 국가 체제의 안정을 희구하며 분주한 삶을 살았을 성왕의 의지와 아이디어가 스며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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