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미의식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김태호의 ‘내재율’을 온전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서울 종로구 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질서의 흔적’을 소개하는 서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지난달 15일 시작한 전시는 김태호 화백(1948~2022)이 4일 세상을 떠나며 갑작스레 유작전이 됐다. 표갤러리는 이달 14일까지였던 전시를 27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전시장에는 김 화백이 1995년부터 이어온 ‘내재율(內在律)’ 연작 총 21점이 전시됐다. 2009년 작부터 최신작 6점까지 두루 볼 수 있다. 전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Internal Rhythm 2022-57’(2022년)은 고인이 가장 최근 작업한 내재율 작품이다. 표면색인 주황빛에 시선을 빼앗겼다면, 이윽고 그 아래 숨어있던 분홍, 노랑, 초록빛 색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인은 살아생전 자신의 작업을 “우연성이 아닌 철저한 장인 기질에 의한 창조적 실천”이라 설명했다. 그가 응축된 색들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작업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김 화백은 캔버스 위에 격자 선을 긋고 20여 가지 색을 붓질로 쌓아올린다. 한 겹의 물감이 마른 뒤에 다음 물감을 덧입히기 때문에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수많은 색이 쌓여 두께가 약 1.5㎝ 정도에 이르면, 그는 조각칼로 이를 깎아내고 구멍을 뚫어 벌집 같은 겹겹의 방을 만든다.
출품작 중 가장 큰 사이즈 작품인 ‘Internal Rhythm 2018-63’(가로 132㎝, 세로 195㎝)을 보면, 고인이 더했을 심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고인은 수많은 사각의 작은 방들을 “저마다의 생명을 뿜어내는 소우주”라 말하곤 했다. 이 맥락에서 작품을 보면 지워내면서 드러나는 색들은 다층적인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표미선 표갤러리 대표는 “김태호의 단색화는 한국 단색화가 추구하는 수행과도 같은 반복적 행위와 동양 사상의 정신성을 그대로 담아낸다”며 “멀리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 아닌, 가까이 다가가 색층 사이사이 일렁이는 물감 층의 리듬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김 화백의 디지털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내재율 실물 작업을 재해석해 영상으로 시각화한 NFT(대체불가토큰) 작품들이다. 고인은 원로화가임에도 지난해부터 NFT 시장에서 활발한 행보를 이어왔다. NFT 플랫폼 ‘업비트 NFT’에 지난달 내놓았던 NFT 작품 총 5개가 본관에서 상영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