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남자의 계절? 고독한 남자가 위험하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16일 0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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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음주·신체 증상으로 우울감 표출…‘강한 남성=감정 억압’ 꽁꽁 옭아매
정서적 네트워크 단절…자살률 女 2.2배
남성끼리도 힘든 마음 공유 안 해…“가족·전문가 등 사회적 지지 확보해야”

정신 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남성의 우울증 진단율은 여성의 절반 수준이지만, 자살률은 2배를 웃돈다. 힘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다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는 탓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성의 우울증 진단율은 여성의 절반 수준이지만, 자살률은 2배를 웃돈다. 힘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다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는 탓이다. 게티이미지뱅크

# “퇴근 후 차 안에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

자녀 둘을 키우는 조모 씨(39)는 4년 전 첫째가 태어나 행복하기도 했지만,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가 점차 어깨를 짓눌렀다. 육아와 가사 분담 문제로 아내와 다툼이 잦아지면서 부부간 대화도 줄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임에 몰두해봤지만 이마저도 흥미를 잃었다. 참을 수 없이 답답한 날에는 차에서 음악을 틀고 남몰래 소리를 지르곤 한다.

# “집에 가면 강아지만 날 반겨”

50대 가장 박모 씨가 밤늦게 퇴근하면 반겨주는 것은 애완견 시추뿐이다. 문득 밀려오는 공허함에 눈물이 핑 돌 때면 갱년기가 왔나 싶다. 대학생 아들은 아내 없이 박 씨와 단둘이 있게 되면 스마트폰만 보거나 방에 들어가 버린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았는데…. 밤마다 혼자 조용히 소주잔을 기울이는 날이 많다.

‘사나이는 태어나 딱 세 번만 운다’라는 말은 이제는 그다지 유효하지 않은 빛바랜 표현이 됐지만, 여전히 울음을 꾹 참고 사는 남자들이 많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강한 남자이자 바람직한 남성상이라고 학습되어온 탓이다. 밖으로 꺼내지 않고 묻어둔 남성의 우울, 불안, 스트레스는 가족 등 주변 사람에게 공감과 지지를 받기 어려운 영역이다. 정서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을 경우조차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남성은 우울증에 덜 걸린다?
전 세계적으로 남성의 우울증 진단율은 여성의 절반 수준으로 보고 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지난해 우울증 치료를 받은 여성 수는 61만5539명으로 우울증 환자의 67.6%를 차지했다. 남성 우울증 환자 수는 29만5246명에 불과했다.

그래픽=안지현 기자 anji1227@donga.com
그래픽=안지현 기자 anji1227@donga.com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남성의 우울증 발병률 자체가 낮은 게 아니라, 여성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제대로 진단되지 않고 있다고 본다. 우울증의 전형적 증상은 2주 이상 우울감 지속, 무기력·피로감, 식욕 저하 등인데 남성 우울증은 비전형적으로 나타나 본인도 눈치채지 못할 뿐 아니라, 오진되기 쉽다는 것이다.

미국심리학회(APA)가 출간하는 ‘남성 및 남성의 심리학’에 실린 우울증의 성별 차이에 관한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남성의 우울감은 분노, 짜증, 음주(알코올 의존) 행위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힘들거나 슬프다는 감정표현보단 화를 내거나, 술을 마시면서 우울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위험한 스포츠에 몰입하거나 도박, 게임 등에 중독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성욕 감퇴나 성 기능 저하 등도 남성 우울증 증상 가운데 하나다. 경북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장성만 교수팀이 전국 정신질환실태역학조사에 참여한 성인 1만8807명을 분석한 결과 남성 우울증 환자는 성욕 감퇴 증상을 여성보다 2배 더 많이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근육통, 소화 장애, 만성피로 등 신체적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아 우울증 진단을 더욱 헷갈리게 한다. 장 교수는 “우울증 환자를 평가할 때 성별에 따른 증상 차이를 고려해 치료 목표를 정하고, 약물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숨겨진 우울감…자살률은 여성의 2배
그래픽=안지현 기자 anji1227@donga.com
그래픽=안지현 기자 anji1227@donga.com


연간 자살률 통계를 살펴보면 남성의 정신건강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남성의 우울증 진단율은 여성의 절반 수준이지만, 자살률은 여성의 2.2배에 이른다.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사망 원인통계에 따르면 남성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5.9명, 여성은 16.2명으로 나타났다.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은 “여성보다 사회적 관계망이 약하고, 감정을 표현하는데 미숙한 남성들이 위기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며 “모든 것을 내가 다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성도 극단적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특히 40대 이후 중년기를 지나면서 남녀 자살률은 큰 폭으로 벌어진다. 자녀 양육, 부모 세대 부양 등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시기지만,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하느라 소진된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6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2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남성의 자살 동기 1, 2위는 각각 경제생활 문제(31.8%)와 정신적 문제(30.2%)였다.

독일의 정신의학과 의사인 콘스탄체 뢰플러는 저서 ‘남자,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남성 우울증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보가 부족하면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기 십상”이라며 “남성 우울증 특유의 징후를 남성 우울증 진단 매뉴얼에 속속 포함시켜 남성에 초점을 맞춰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약해 보일까 봐”…마음속 동굴로
남성끼리조차 마음을 잘 터놓지 않는 특유의 남성문화는 감정 소통을 막는 데 영향을 준다. 자신의 약한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고, 그나마 속내를 말하려면 술기운을 빌려야 가능한 경우가 많다.

힘든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나약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남성문화는 남성 간에도 속 깊은 대화를 제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게티이미지뱅크
힘든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나약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남성문화는 남성 간에도 속 깊은 대화를 제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게티이미지뱅크

오랫동안 우울증을 겪어온 취업준비생 이모 씨(27)는 “아무리 친구라도 내 약점을 드러내면 지질하고 연약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다. 술자리에서 ‘야, 죽겠다. 그냥 마시자’라는 것이 표현의 전부”라고 말했다. 또 “힘들면 위로받고 싶은 마음은 남녀가 다 똑같을 것”이라며 “하지만 남자들의 대화는 공감보단 조언이나 해결책 제시 위주로 흘러가다 보니 괜히 얘기를 꺼냈다는 생각이 들어 속 얘기를 잘 안 하게 된다”고 했다.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과 책임감이 남성을 마음속 동굴로 집어넣기도 한다. 두 자녀를 키우는 직장인 안모 씨(38)는 “남자들은 ‘내가 무너지면 가족 전체가 무너진다’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에서 특히 힘든 내색을 하기가 더 힘들다”고 했다.

●감정 소통 창구 열어야…“가족 역할 중요”
남성 우울증 문제 해결의 답은 결국 소통에 달려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남성 우울증 문제 해결의 답은 결국 소통에 달려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남성의 정신건강 회복을 위해서는 단절된 정서적 네트워크 확보가 필수적이다. 특히 가족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회적 능력이 없다거나, 삶이 실패했다고 느낄 때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여 줄 배우자나 부모, 형제 등 마음을 터놓을 대상이 필요하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여성보다 사회적 지지체계가 부족한 남성이 가정으로 돌아와 힘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족 분위기 형성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갑자기 말수가 적어지거나, 피곤하다는 이야기를 부쩍 많이 한다면 가족 구성원들이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전문적인 도움을 받고 싶지만 병원이나 상담센터에 직접 찾아가는 것이 꺼려진다면 비대면 상담 플랫폼을 이용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동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화상, 채팅, 전화를 통한 다양한 비대면 상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많아졌다. 이 교수는 “대면으로 심리상담, 검사, 약물치료 등을 받을 생각을 하면 치료에 대한 마음의 벽이 굉장히 높아질 수 있다. 직장에 마련된 사내 상담실을 방문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전문가에게 접근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춘 서비스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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