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국채 가격이 폭락하는 등 글로벌 채권시장 혼란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인사들의 기준금리 인상 발언 하나하나에도 충격을 받으며 와르르 무너지는 등 하루에 급등과 급락을 오가는 극도로 민감한 추세가 반복되고 있다.
미국 국채시장은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 영국 국채시장 대혼란 여파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변동성을 보이며 유동성 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한국도 레고랜드 사태발 충격으로 채권시장 자금줄이 말라붙으며 국고채 금리가 21일 한때 4.6%대로 11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미국의 부채를 지탱하는 채권국 일본의 엔화 가치 폭락도 글로벌 금융시장의 뇌관으로 꼽힌다. 엔화 폭락을 막으려 일본이 보유 중인 미 국채를 대량 매도하거나 자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 수준을 0.25% 상한선으로 묶어두는 정책을 결국 포기할 경우 세계 채권시장이 대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23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은 “글로벌 채권시장이 금융위기 이후 끝없는 최악의 대혼란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세계 채권시장, 금융위기 이후 최악 대혼란”
올해 1월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는 1.631%였지만 9개월 만인 이달 21일 장중 한 때 4.3%를 넘어서며 14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1984년 이후 처음 12주 연속 최장기 상승세를 보인 결과다. 치솟던 미 국채 금리는 12월 연준이 금리 인상 속도 조절에 나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하면서 4.16%대로 내려온 상태다.
미 국채 금리 급등, 즉 국채 가격 폭락은 시장 전반의 유동성이 말라가고 있다는 의미다. 이에 미 재무부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유동성 공급을 위해 국채를 사들이는 ‘바이백’ 프로그램 도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영국에 이어 미국도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국채를 팔아 유동성을 회수하는 동시에 정부는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국채를 사들여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아슬아슬한 사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동성이 말라가는 가운데 작은 정책 변화에도 시장이 발작을 일으키자 이를 막기 위해 서로 모순되는 정책을 동시에 내놓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보고서에서 “미 채권시장은 한 번의 충격에도 깨지기 쉬운 상태”라고 했다. 일본은행이 엔화의 추가 폭락을 막기 위해 금리 상한선 정책인 ‘수익률곡선통제(YCC)’를 완화하는 경우 등을 채권시장에 충격을 가하는 사안으로 꼽았다.
○ 구매력 감안 엔화 실질환율 52년 만 최저
세계 3대 경제 대국인 일본 엔화 가치 폭락은 세계 금융시장의 또 다른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24일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엔-달러 환율이 10분 만에 4엔 넘게 떨어졌다가 다시 상승하는 혼란이 벌어졌다. 가까스로 시장의 ‘심리적 저항선’인 달러당 150엔 턱밑으로 유지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일본 금융당국이 3차 개입에 나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정부와 일본은행이 급속한 엔화 약세에 대응해 21일에 이어 엔화 매수 개입을 했다는 관측이 있다”고 보도했다. 스즈키 슌이치(鈴木俊一) 일본 재무상은 이날 오전 기자들과 만나 “지금은 투기 세력과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다. 이를 고려해 코멘트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개입을 거듭하며 환율 방어에 나서고 있지만 일본이 저금리를 고집하면서 미일 간 금리 차가 벌어지는 한 엔화 가치 하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구매력을 감안한 통화의 체력을 보여주는 엔화 실질실효환율은 9월 기준 57.95(2010년을 100으로 했을 때 지수)로 1970년 이후 52년 만에 최저치였다.
미 투자전문지 배런스는 “세계 최대 채권국인 일본이 엔화 폭락을 막기 위해 미국 국채를 매도해 달러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가뜩이나 유동성이 말라가는 미국 국채시장에 금리 급등을 부른다”며 엔화 폭락의 세계 경제 파급효과를 우려했다. 일본은행이 결국 엔화 폭락을 막기 위해 YCC 정책을 완화한다면 글로벌 일본 자금이 자국으로 돌아가며 또 한번 세계 채권시장의 변동성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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