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엘시티(LCT) 건물 78층 계단. 절규 섞인 호흡소리가 밀폐된 벽에 부딪혀 메아리가 돼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등에 멘 20㎏ 공기호흡기(산소탱크)는 거대한 바위를 짊어진 듯했다. 공기가 잘 안 통하는 긴 방화복이 온몸을 덮어 땀은 비 내리듯 쏟아졌고, 눅눅해진 바지가 허벅지에 자꾸 들러붙어 한 계단 한 계단 발을 디디가 쉽지 않았다.
● 방화복 세트 풀 장착하고 24분 만에 101층 올라
이날 동아일보 기자도 화재 진압장비 풀세트를 장착하고 엘시티에 올랐다. 부산소방재난본부가 연 ‘전국 소방공무원 해운대 엘시티 계단오르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670명의 소방관과 함께였다. 총 높이 411.6m, 110층의 엘시티는 555m(127층)의 서울 롯데월드타워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대회는 경쟁 부문(방화복·간소복·4인 계주)과 비경쟁 부문 등으로 나뉘었는데, 방화복 풀세트를 착용하고 참가한 이는 78명이었다. 처음엔 속도를 내던 소방관들은 70층이 넘어선 뒤 헉헉대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괴로워하면서도 “다 왔다.” “할 수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인 뒤 계단 오르기에 사력을 다했다.
그 결과 670명 전원이 완주했다. 방화복 부문 1위는 충북 청주 동부소방서의 윤바울 소방교가 차지했다. 23분 48초 만에 1층부터 2372개의 계단을 밟아 꼭대기 층에 도달한 것. 여성 소방관의 방화복 최고기록은 44분 9초였고, 방화복 부문 평균 기록은 31분 25초였다. 기자의 완주기록은 35분 27분 기록으로 평균 이하였으나, 방화복을 입고 참가한 10여 명의 취재진 중에는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간소복의 1위 기록은 14분57초였다. 44분33초로 완주한 울산소방본부의 한 20대 여성 대원은 “15층부터 호흡이 가빠왔다. ‘포기할까?’ ‘완주해야 한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 초고층 화재 대처 연습차 자발적 참여한 소방관들
화재대응 훈련을 위해 소방관들이 초고층 건물 계단을 오르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최고기록자에게 표창을 수여하는 등 빨리 오르기 경쟁을 목적으로 이벤트가 열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부산소방본부는 “전국 소방관의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기원을 위해 대회를 마련했다”고 대회 개최 취지를 설명했다.
특히 소방당국은 이번 대회로 전국 소방관이 초고층 빌딩 화재에 더 경각심을 가지길 바라고 있다. 부산소방본부 관계자는 “공기호흡기를 착용하고 초고층 건물의 계단을 오르며 자신의 체력을 테스트 해 본 뒤, 평균보다 뒤처지는 이들은 더 열심히 체력 훈련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소방당국 내부에선 ‘소방관의 체력이 초고층 화재의 최고 진압 장비’라는 말도 나온다. 50층 이상 초고층 건물이 전국 각지에 건립되고 있지만, 현재의 진압 장비로는 완벽하게 대응할 수가 없기 때문. 고가사다리차는 최대 70m까지만 도달해 23층 이상의 화재는 대처가 어렵다. 소방헬기는 건물 사이 바람이 몰아치면 화재 발생 지점에 접근하기 쉽지 않다. 결국 소방관이 계단에 올라 인명구조와 화재 진압을 동시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방화복 부문의 최고령 참가자인 오재영 부산 금정소방서 소방위(56)는 “부산 전역에 초고층 건물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이벤트가 아니라 더 많은 진압대원이 참여시켜 이 같은 훈련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웅 충북 진천소방서 소방사(25)는 “진천에는 높은 건물이 없지만 언제든 최악의 전국 고층건물 화재 진압에 투입될 수 있다고 여겨 훈련을 목적으로 대회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부산소방본부는 소방관들의 호응이 클 경우 내년부턴 대회 규모를 더 확대하는 방침을 검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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