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으로 뒷받침하는 후원 넘어 전문가들이 프로그램 기획 주도
최적의 후원자-예술가 찾아 연결
그린란드 빙하 유실 문제 다룬 美블룸버그 ‘아이스 워치’ 대표적
국내서도 관련 전문기업 등장해
#1. 18일 서울 강동구 강동성심병원. 진료를 기다리던 어린이 환자들 사이로 일러스트화가인 구지민 작가(30)가 나타났다. 구 작가가 “중력 없는 방이 있다면 뭘 하고 놀까”라는 질문을 던지자, 아이들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잘라 구 작가가 미리 준비한 그림에 붙이기 시작했다. 현직 작가와의 만남에 아이들은 아픈 것도 잊은 채 빠져들었다.
#2. 2018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 광장 앞에 낯선 전시물들이 채워지며 지나가던 시민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그린란드 피오르에서 옮겨온 어른 키보다 살짝 큰 빙산 조각 30개가 예술품으로 배치된 것. 온난화를 경고하기 위해 덴마크 설치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55)이 주도한 ‘아이스 워치’라는 야외 전시였다.
얼핏 닮은 점이 없어 보이는 두 프로젝트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예술가와 후원자를 연결해주는 ‘아트 펀드레이저’가 성사시켰다는 것. 국내에선 ‘문화예술후원매개전문가’라고도 부르는 아트 펀드레이저는 해외에선 이미 낯설지 않은 개념. 미국은 약 1만 명에 가까운 아트 펀드레이저가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선 최근 공연 기획을 중심으로 미술 전시나 예술프로젝트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2019년 유엔의 세계기후변화 회의를 앞두고 열린 ‘아이스 워치’는 미 블룸버그재단의 아트 펀드레이저가 기획을 주도했다. 재단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싶어 하자 적절한 예술가를 찾아 연결시켰다. 당시 현지에서도 “예술과 후원이 만난 모범 사례”라며 반향이 컸다고 한다.
구 작가의 미술치유 워크숍도 마찬가지다. 국내 미술계 아트 펀드레이저 스타트업인 ‘블루버드씨’가 기획했다. 김상미 블루버드씨 대표는 “병원을 찾은 아동을 위한 예술이란 콘셉트를 갖고 후원자인 병원과 미술가인 구 작가를 섭외했다”며 “예술은 감정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만큼 다양한 기획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리그 오브 레전드(LoL) 라이브: 디 오케스트라’도 일종의 아트 펀드레이저가 내놓은 결과물이다. 세종문화회관이 아트 펀드레이저 역할을 맡아 “젊은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클래식 공연을 해보자”는 취지로, 젊은층이 좋아하는 게임인 ‘LoL’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를 기획했다. ‘LoL’ 제작사인 라이엇게임즈가 후원하고 KBS교향악단이 연주를 맡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여성 관람객 위주였던 기존 클래식 공연과 달리, 남성 관람객이 50% 이상이었다. 조휘영 세종문화회관 공연제작마케팅팀 PD는 “객석 점유율이 95%에 이를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특히 20대 예매가 63.9%를 차지해 기획 의도와 잘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아트 펀드레이저는 국내에선 초기 단계이지만 성장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미래 유망 14개 신 직업’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20년부터 아트 펀드레이저 양성을 위한 ‘아트너스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민세정 예술위원회 예술확산본부 차장은 “2020년엔 지원자가 50명이었지만 지난해 71명, 올해는 120명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김성규 전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한국은 문화예술에 대한 모금이나 후원이 활발하지 않은 실정이라 아트 펀드레이저 같은 관련 전문가 양성이 시급하다”며 “문화예술에 대한 후원은 이를 즐기는 저변이 확대된다는 뜻이기에 문화계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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