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워싱턴은 경제안보에 집중할 뿐 한국과 북핵문제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자유를 강조하는 가치외교도 좋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얻어낼 것들은 ‘살라미’처럼 세분화해 실용 외교로 접근해야 합니다.”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61·사진)은 2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실용 외교로 눈을 돌려 ‘실속 외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기문재단과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가 이날부터 28일까지 처음 개최한 ‘환태평양 지속가능성 대화’(Trans-Pacific Sustainability Dialogue) 참석차 방한한 그는 “친구와 적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가치연대만으로는 현재의 미중 갈등을 현명하게 빠져나갈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스탠퍼드대에서 한국학 프로그램을 20년간 운영한 신 소장은 미중 관계와 글로벌 리더십·민주주의 위기 등에 정통한 전문가다. 한미 주요 언론에 자신의 견해를 활발하게 내놓는 유명 재미석학이기도 하다. 특히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당시엔 북-미 정상회담 전후로 막후에서 한미 간 가교역할도 담당했다. 또 미 정부 고위급 인사들에게 북핵 관련해 활발하게 조언한 인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 “가치연대 좋지만 챙길 건 챙기는 실용외교 중요“
신 소장은 “미중 관계의 판을 흔든 건 거친 언사로 무장한 트럼프 대통령이었다”면서도 “지금 조 바이든 행정부는 그걸 더 촘촘히, 꼼꼼하게 실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워싱턴이 한국에 관심이 있다면,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입법이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나 ‘칩4회의’(반도체협력대화) 등 다자주의 프레임워크에 한국이 참여하길 바라는 정도”라고 했다. 대만해협 무력충돌 문제나 반도체 등과 같은 산업기술 분야에서 미중 간 경쟁이 격화하면서 한국이 미국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는 현실을 경고한 것이다.
그는 인터뷰 내내 한국이 위기의식을 느낄 필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대만 문제에 대한 심각성도 한국이 더 인지해야 한다고 재차 언급했다. 신 소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3연임을 넘어 4연임, 나아가 종신 집권까지도 가능하다”면서 “5년 뒤 4연임을 하려고 할 때 대만문제에서 그 연임의 명분을 찾으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한국으로선 그때가 되면 북한 문제보다 대만 문제가 더 힘들지 모른다”며 “미국이 어디까지 개입할지가 관건인데 주한미군을 빼가지 않을 거란 보장도 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신 소장은 “주한 미대사의 주한미군 차출은 걱정 말라는 ‘립 서비스’만 철석같이 믿는다면 순진한 생각”이라며 “심각하게 대응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앞서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는 18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주한미군과 미국의 의지는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다”며 대만 무력 충돌 시 주한미군 차출 가능성에 선을 그은 바 있다.
아울러 다음달 7일 치러질 미국의 중간선거 이후 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손질을 기대하고 있는 한국 정부와 기업에도 장밋빛 낙관만 하는 건 금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이 승리해도 “1년 유예 정도만 가능하지 전면 수정이나 한국이 원하는 것처럼 대폭 손질은 어렵다는 게 미 상·하원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신 소장은 IRA 전기차 세액공제가 한국 기업들에 대한 차별 논란으로 불거진 최근 상황 관련해 한국 국민들의 반감이 오히려 실용외교의 추진력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에 힘으론 안 되지만 ‘긴장의 비대칭’을 활용할 수 있다”며 “국민들이 배신감을 느끼고 문제제기 하는 반미 정서나 여론이 커지면 미국도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미국한테 간다(붙는다)고 해서 미국이 막말로 챙겨주지 않는다”면서 “달라면 다 주는 게 아니라 얻을 건 스스로 챙기는 외교를 해야 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 “尹정부, 인재 활용 리더십 부족, 인사에 감동 없어”
윤석열 정부의 출범 6개월 총평을 부탁하자, 신 소장은 “지난 정부보다 민주주의가 더 발전했다고 보긴 어렵다”며 입을 열었다. 그는 “정부가 40%이상의 중도층, 젊은 지지자들을 끌어안으려면 이들이 투표 때 지지했던 가치들, 즉 공정과 상식에 현 정부가 부합하고 있는지 그 물음에 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소장은 또 “현 정부는 경험 많고 전문성이 풍부한 개인들이 입각했지만 이들을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과 리더십이 부족하다”며 “(최고 지도부가) 아직 검찰 리더십에서 정치 리더십으로 전환이 안 됐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산업화 시대엔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다양성이 중요하다”면서 “서울대·50대·남성 이른바 ‘서오남’ 일색인 인사에 감동이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다양성을 균형과 배려 차원으로만 접근하면 안 된다”고도 했다.
● “실리콘밸리도 달라져…한국도 다양한 가치 주목해야”
신 소장은 다양성에 대한 끝없는 학문적 연구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손잡고 이번 ‘환태평양 지속가능성 대화’를 기획하게 한 배경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기후변화나 지속가능성 발전과 같은 주제가 중요성에 비해 주목도가 떨어진다’고 하자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 와인을 떠올리면 어떠냐"고 되물었다. 이어 “나파밸리 포도는 품종이 굉장히 민감해서 온도가 1도만 올라가도 맛이 완전히 바뀐다”며 “기후 변화는 매우 민감한 문제인데 사람들이 잘 못 느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보다 현실적인 방식으로 기후변화가 얼마나 우리 일상을 바꿔 놓을 수 있는지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지난달 스탠퍼드대에는 70년 만에 ‘지속가능 대학(School of Sustainability)’이 문을 열었다. 미 벤처 투자가인 존 도어(71)가 기후변화 해결을 위해 대학에 11억 달러(1조4000억 원)를 쾌척한 것을 포함해 대학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기부금(16억9000만 달러·2조4053억 원)이 모였고, 학부 및 대학원 과정까지 설립된 것. 지속가능대학 내에는 △사회과학부 △지구시스템과학부 △지구물리학과 △지질학부 △에너지공학부 △해양학부 △토목환경공학부 등 7개 학위과정이 개설됐다.
신 소장은 “실리콘밸리에서 이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보는지 보여준다”며 "그동안 외교안보나 북한 문제만 주로 다뤘지만 이제 새로운 다양한 가치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앞으로 환태평양 지속가능대화에서도 기후변화 뿐 아니라 여성이나 젠더, 불평등 문제 등까지 폭넓게 다룰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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