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삶이 헝클어져 있었다.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근속휴가를 신청하고 중학생 딸을 차에 태워 국내 여행에 나섰다. 준비 없이 떠났는데 마음이 자꾸 자연으로 향했다.
그래서 찾게 된 곳이 경북 군위군 10만 평 부지에 지난해 9월 문을 연 사유원(思惟園)이다. 늦가을 억새가 우거진 흙길을 천천히 걸어 올랐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은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 국내 건축가 승효상과 최욱의 건축물을 둘러보는 MZ세대들이 보였다. 인증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지 않고 고요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정원으로 불리지만 법적으로는 수목원인 사유원은 대구의 한 철강회사 회장이 15년 동안 만들었다.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300년 수령의 모과나무를 사들인 것을 계기로 전국의 노거수를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너른 모과나무밭에 서니 숙연해졌다. 시자가 건축한 작은 채플 안에 들어오던 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았다.
사유원은 경북의 외딴곳이라는 입지, 만만치 않은 입장료에도 지금까지 3만여 명이 찾았다. 10명 중 6명은 수도권 거주자, MZ세대로 평균 체류시간은 5시간이다. 야외무대에서 열리는 클래식 공연은 자연과 예술을 접목한 정원 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2019년에 국가정원 2호로 지정된 울산 태화강국가정원도 처음 가 봤다. 세계적 정원 디자이너인 네덜란드의 피트 아우돌프가 지역 주민들과 최근 식재를 마친 자연주의 정원이 궁금해서였다. 그는 꽃이 지고도 형태가 유지되는 식물을 활용한 친환경 정원을 각국에서 선보여 왔다. 그가 심은 벌개미취와 참당귀 등 자생종이 자라나 십리대숲과 어우러질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산업단지 오·폐수로 인한 죽음의 강에서 철새들이 찾아오는 생명의 강으로 탈바꿈한 이곳이야말로 생명의 회복력을 보여주는 정원이 될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다.
코로나19, 입시경쟁, 이태원 참사…. 지치고 힘든 일들이 많지만 다행히도 최근 우리 땅 곳곳에는 정원 조성 바람이 불고 있다. 두 곳의 국가정원(순천만국가정원과 태화강국가정원)을 비롯해 지방정원(5곳 등록, 40곳 설계·조성 중)과 민간정원(83곳)이 있다. 국·공립, 사립 수목원도 70여 곳에 이른다. 이번에 들른 경주의 경북천년숲정원은 경북산림환경연구원 부지의 산림을 기반으로 이달부터 임시 개방한 경북의 첫 지방정원 예정지다. 막바지 가을 단풍과 외나무다리를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차를 몰다보니 정원 답사가 됐다. 그런데 누군가 이번 여정 중 어느 곳이 가장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정원’이란 타이틀은 없지만 아침 물안개가 꿈결 같던 안동의 낙강물길공원과 해질녘 경주의 서출지를 꼽고 싶다. 늦가을의 끝자락에서 격조 있게 빛을 잃어가는 수목과 철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좋았다. 선진국형 여가인 정원이 국내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반갑다. 다만 의욕이 지나쳐 인위적으로 많은 것을 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내 경우에는 자연이 자연스럽게 있어줄 때 가장 큰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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