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우선’ 말뿐… 보행자가 車 피해다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6일 03시 00분


[보행자에 진심인 사회로]〈20·끝〉평택 보행우선도로 가보니

4일 오후 경기 평택시 서정리역 인근 보행자우선도로에서 오토바이 운전자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서정리역 일대는 올 8월 4일 보행자우선도로로 정식 지정됐지만 시행 넉달여가 지나도록 운전자는 물론이고 보행자 상당수도 지정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평택=유채연 기자 ycy@donga.com
4일 오후 경기 평택시 서정리역 인근 보행자우선도로에서 오토바이 운전자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서정리역 일대는 올 8월 4일 보행자우선도로로 정식 지정됐지만 시행 넉달여가 지나도록 운전자는 물론이고 보행자 상당수도 지정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평택=유채연 기자 ycy@donga.com
4일 오후 경기 평택시 지하철 1호선 서정리역 일대. 올 8월 4일 보행자우선도로로 지정된 이 도로의 제한속도는 시속 20km다. 그러나 30분 동안 지나간 배달 오토바이 5대는 모두 제한속도를 10km 이상 초과해 도로 중앙 부분을 ‘쌩’ 하고 지나갔다.

도로 바닥에는 ‘보행자우선도로’라고 적혀 있고 제한속도 20km를 알리는 표지판도 서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 서행하는 차량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속도를 낸 채 보행자를 요리조리 피하며 위험천만한 상황을 연출했다. 현장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배달기사 전모 씨(56)는 “제한속도가 시속 20km인지 몰랐다.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라고 했다.
○ 보행자도 모르는 보행자우선도로
올 7월 12일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과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국내에서도 보행자우선도로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지방자치단체가 보행자우선도로로 지정한 도로를 운전할 경우 제한속도(시속 30km 또는 20km)를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행자가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지나가는 사람과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제한속도를 초과해 보행자를 추월하거나 경적을 울리며 보행자를 위협하면 범칙금 4만 원이 부과된다. 손해보험협회는 보행자우선도로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차량이 100% 과실 책임을 진다는 기준도 마련했다. 보행자우선도로는 현재 전국에 25곳이 지정돼 있다.


이에 앞서 정부는 2019년 서정리역 일대 1320m 구간 등을 보행자우선도로 시범사업지로 선정하고, 평택시와 함께 보행자가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각종 시설물을 설치했다. 현재 서정리역 일대에는 시작 지점과 끝 지점에 보행자우선도로임을 알리는 파란색 표지판이 설치됐고, 제한속도 20km를 표시한 안내판도 마련됐다. 도로 바닥은 아스콘으로 포장해 일반 아스팔트 도로와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서정리역 일대의 경우 시범사업 기간까지 포함해 보행자우선도로로 운영된 지 3년이나 흘렀지만 정작 보행자 상당수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거리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남모 씨(42)는 “승용차도 많고 오토바이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다. 보행자우선도로인 줄 전혀 몰랐다”며 “차량과 오토바이를 피해 다니고 있다”고 했다.

보행자우선도로에선 보행자가 도로 전 구역에서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이날 현장에선 불법 주·정차 차량 수십 대가 도로 양측을 막아 보행자들은 주차된 차량 사이로 지나다녀야 했다. 주차된 차들을 피해 주행하는 차량들이 도로 중앙을 점령한 탓이다.

행정안전부는 시범사업 현황을 조사하면서 “주차로 인한 주민 간 갈등을 해소하고 안전한 보행로를 확보하기 위한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는데, 현장에선 아직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골목을 걷고 있던 김정미 씨(42)는 “차들이 양옆으로 주차돼 있는 경우가 많아 차를 피해 다니는 것이 일상적”이라고 했다.
○ 보행자우선도로, 서울엔 1곳도 없어
보행자우선도로는 자동차와 보행자가 뒤섞이는 이면도로에서 사망 사고가 다수 발생하는 상황을 개선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7∼2021년) 국내 교통사고 사망자의 38%가 보행자인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019년 기준 19.3%)의 2배가량이다. 특히 전체 보행 사망자 10명 중 7명이 이면도로에서 사고를 당했다.

12일이면 보행자우선도로 시행 5개월이 되지만 여전히 보행자우선도로에 대한 홍보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2013년부터 시범사업을 시작한 서울시의 경우 현재 시범사업지를 100곳이나 운영하고 있지만 보행자우선도로로 정식으로 지정된 곳은 1곳도 없다. 서울시 관계자는 “교통안전시설 표지판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데, 일부 도로에서 설치가 늦어지고 있다”며 “규격에 맞는 표지판을 설치한 다음 보행자우선도로를 고시할 계획”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보행자우선도로 지정과 안전시설 마련 못지않게 제도를 알리려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준한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지자체들이) 노면 포장 등 도로 정비에 보행자우선도로 사업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반면 우선권이 보행자와 차량 중 어디에 있는지, 제한속도는 시속 몇 km인지 등 정작 중요한 정보는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 수석연구원은 또 “초기에 집중 단속을 통해 보행자우선도로의 존재를 알리는 한편으로 지속적인 홍보를 병행해 보행자 안전이 철저히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
▽ 김재형(산업1부) 정순구(산업2부) 신지환(경제부) 김수현(국제부) 유채연(사회부) 기자


공동 기획: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경찰청 한국교통안전공단 손해보험협회 한국도로공사 도로교통공단 한국교통연구원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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