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공간이 ‘안방’에서 ‘세상 밖’으로 확대되면서 자의식의 성장과 함께 순응하지 않고 점차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인식도 엿볼 수 있습니다.”
‘내방가사’는 4음보 율격이란 틀 외에는 자유롭게 형식이 돋보이는 조선시대 한글 문학이다. 1980년대부터 약 40년간 내방가사를 연구해온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66)는 11일 “내방가사를 보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화를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북 안동에서 해마다 열리는 ‘내방가사경창대회’의 심사위원장도 맡고 있는 이 교수는 최근 문화재청의 ‘미래 무형문화유산 발굴·육성’ 사업 공모에 선정돼 내방가사의 무형유산적 가치를 연구하고 있다.
내방가사는 남성중심사회에서 억압돼 밖으로 표출하기 어려웠다고 여겨졌던 16~17세기 동아시아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점들이 주목받으며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보수 유교 문화가 짙은 조선 사회. 특히 그 중심지로 알려진 안동에서 내방가사는 어떻게 향유되기 시작했을까. 이 교수는 “조선 초기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를 가던 혼인의 형태가 지금처럼 바뀌면서 시집가는 딸에게 덕목, 행동거지를 가르치고자 조선후기 학자 송시열이 쓴 ‘우암선생계녀서’(尤庵戒女書)와 같은 교양서가 나왔다”면서 “교육을 중시한 안동 지역에선 이를 4.4조의 가사형식으로 변형한 가사(계녀가)를 창작한 걸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후에 내방가사의 내용은 신세 한탄이나 풍류·기행 등으로 확대된다. 이 교수는 “화전가나 유람가를 보면 ‘이런 놀음 남자들만 하느냐’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와 같이 강해진 자의식이 드러난다”면서 “퇴계 이황의 행적과 덕을 추모한 ‘도산별곡’이나 조선 역사를 다뤄 교과서처럼 읽힌 ‘한양가’ 등 남성이 쓴 가사도 여성들이 모여 낭송하거나 필사하는 형태로 향유했다”고 설명했다.
내방가사는 조선 후기 지배층 수탈로 곤궁한 서민의 삶 등 사회상도 드러낸다. 이 교수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3번이나 재가하지만 경제적으로 몰락해 유랑하는 여성의 탄식을 담은 ‘덴동어미화전가’와 관련 “과부재가금지법이 있던 조선 사회가 후기로 가면서 과부의 재가가 자유로워졌고, 당시 가혹한 징세와 수탈로 인한 궁핍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2015년 남편인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전 국립국어원장)와 함께 평생 수집한 내방가사 292점을 국립한글박물관에 기증했고, 박물관은 이를 가지고 올 상반기 ‘이내말씀 들어보소. 내방가사’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