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한 살 또 나이를 먹었지만 귀는 다행히 나이를 안 먹었나 보다. 새로운 노래가 좋다. 지난해 데뷔한 여성그룹 뉴진스의 신곡 ‘Ditto’와 ‘OMG’에 빠졌다. 멤버 중 막내 혜인이 만 14세. 평균연령 16.6세. 지적 성장판 아닌 실제 성장판이 활짝 열린 아이돌이다. 특히나 애타는 짝사랑을 다룬 ‘Ditto’는 들어도, 들어도 안 물린다.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몽글몽글한 신시사이저 화성. 그 밑그림 위로 ‘Woo woo woo woo ooh∼’ 하는 도입부가 스피커에 흩뿌려질 때면 열 몇 살 때 이후 차갑게 식었던 이 내 ‘심장’이 아찔하게 되살아나는 듯하다. 어떤 노래가 대책 없이 좋아지면 그 노랫말을 실생활에서 내뱉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얼마 전 영국 출신 케이팝 작곡가 샘 카터가 기나긴 영어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취지의 말을 건네기에 쿨하게 ‘Ditto(마찬가지)!’라고 받아줬다.
#1. 호모 사피엔스의 육체적 성장판에는 기한이 있지만, 문화적 인간인 호모 루덴스의 지적 성장판, 감성적 성장판에는 그런 것 따위 없나 보다. 지난해 우린 적잖은 나이에도 아직 그것이 닫히지 않은 아티스트 몇 명을 재확인했다. 나훈아는 판타지 게임 주인공 같은 뮤직비디오 연기로 파격했고, 조용필과 최백호는 공교롭게도 나란히 ‘찰나’라는 제목을 화두로 국내외의 젊은 케이팝 아티스트나 작곡가들과 협업해 컴백했다.
#2. 음악계에서 지난해 파격을 감행한 또 한 명의 ‘성장판 미(未)폐쇄’의 아티스트를 알고 있다. 작년 초 11집 ‘Waking World’를 낸 나윤선. 프랑스를 기반으로 유럽을 일찌감치 ‘접수’했던 이 세계적 재즈 보컬은 신작에서 손수 편곡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해 기이한 ‘일렉트로닉 팝’의 소리 풍경을 펼쳤다. 2001년생 미국 팝스타 빌리 아일리시를 데뷔 때부터 눈여겨봤다던 그가 아예 아일리시의 작법을 연구하며 신작의 소릿결을 벼렸다고.
#3. 최근 만난 나 씨는 난생처음 머리카락을 탈색하고 새빨간 뾰족 안경테를 쓰는 시각적 변신도 감행한 상태였다. “그저 변화를 주고 싶었다”고.
“제 멘토가 계신데,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 보며 평생 안 해본 세 가지를 적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자기 전까지 그중에 사소한 것 한 가지라도 이루려고 노력해 보라고…. 요즘 그 말이 머리를 울려요. 희윤 씨도 이참에 머리 한번 샛노랗게… 어때요?”
#4.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캐럴, 팝, 재즈를 부르던 1934년생 미국 팝가수 팻 분은 1997년,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광기를 폭발시켰다. ‘In a Metal Mood: No More Mr. Nice Guy’라는 앨범에서 민소매에 근육질 상체를 보여주며 주다스 프리스트, 메탈리카의 곡을 재해석한 것. 1949년생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2012년 앨범 ‘Wrecking Ball’에 격렬한 랩 메탈 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기타리스트를 참여시켰다.
#5. 음악성과 나이는 반비례할까, 정비례할까. 모르긴 몰라도 ‘정답!’ ‘별 상관없다’에 한 표! 2011년, 미국 리코딩 아카데미는 블루스 피아니스트 파인톱 퍼킨스에게 그래미 트로피를 수여했다. 퍼킨스의 나이, 97세였다. 그래미 최고령 수상자다. 퍼킨스의 아성에 도전한 이가 있으니 1926년생 토니 베넷. 팝 아이콘 레이디 가가와의 듀엣 앨범으로 지난해 그래미를 받았다. 95세였다.
#6. 별난 성장판 이야기는 예술계, 별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2023년은 다 함께 귀를 좀 더 열어 보는 해로 삼으면 어떨까. 각종 음원 서비스, 유튜브 덕에 지구상 거의 모든 음악을 거의 공짜로 들어 볼 수 있는 지금은 바야흐로 ‘듣기’의 골든 에이지(황금시대)니까.
#7. 임종 때 주의사항으로 회자되는 흔한 상식(?) 하나. 심장은 정지해도 청각은 당분간 살아 있으니 고인 곁에서 험담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청각이야말로 가장 늦게 늙고 가장 늦게 닫히는, 젊음의 감각이 아닐까. 그러니 내 곁의 그대, 부디 말해 달라. 나와 함께 늙어가겠다고. 새 청바지를 사러 함께 외출하겠다고. 나와 함께 2033년에도, 2043년에도, 2083년에도 신곡을 듣고 ‘개똥 평론’을 나누겠다고…. 지금 당신께 듣고픈 말이 있으니 그것은 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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