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서로 다른 종(種)이 결합하여 부자연스러운 개체를 만들 때 탄생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암말과 수탕나귀가 교배하여 태어나는 동물인 노새가 종종 괴물로 취급받곤 했다. 미노타우로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러한 대표적인 괴물이다. 미노타우로스는 머리와 꼬리는 황소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인간이다.
미노타우로스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크레타의 왕 미노스가 포세이돈 신에게 잘생긴 황소를 바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덜 잘생긴 황소를 바쳤다. 이에 분노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가 그 잘생긴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달아오른 파시파에는 잘생긴 황소를 유혹한 끝에 교접하고, 그 결과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나게 된다. 이에 당황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미궁을 만들게 하고 그 미궁 한가운데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둔다. 마침내 아테네의 테세우스가 도착하고, 공주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궁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여 버리게 된다.
이것이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생애다. 인간도 아니고 황소도 아니어서 결국 미로에 갇힌 끝에, 테세우스의 영웅화 과정에서 땔감이 된 존재, 미노타우로스의 서글픈 생애. 미노타우로스의 외모는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가 무슨 죄인가. 부모가 교접한 결과가 아닌가. 미노타우로스가 사람을 잡아먹기는 하지만 먹고 싶어 먹는 것도 아니다. 반인반수의 존재로서 그는 사람 이외의 다른 것을 먹을 수 없게끔 태어났다. 굳이 이 사태의 책임을 따지자면, 왕비와 황소에게 있고, 더 원천적인 책임은 신을 기만한 미노스에게 있고, 아주 궁극적인 책임은 성질이 더러운 포세이돈에게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가장 고통받은 것은 불쌍한 미노타우로스다. 그의 고통은 죽었다고 끝나지 않는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보면 단테가 지옥에서 미노타우로스와 마주치는 대목이 나온다. 미노타우로스는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뒤 지옥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후 미노타우로스는 부정적인 의미의 괴물로 거듭 묘사되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원전 2, 3세기경 모자이크에서 보이듯이, 고대의 많은 도판에서 미노타우로스는 테세우스에게 얻어맞는 모습을 하고 있다.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단테의 신곡 삽화에서도 미노타우로스는 고통에 신음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미노타우로스의 묘사 전통은 현대에도 계속된다. 이 ‘괴물’에게 집착한 대표적인 예술가가 바로 그 유명한 파블로 피카소다. 그는 미노타우로스를 소재로 한 작품을 70여 점이나 남겼다. 미노타우로스의 어떤 점이 그토록 피카소를 사로잡은 것일까? 기존의 것을 답습한다는 말 자체가 가장 모욕이 되는 분야가 현대 예술이다. 상상력 넘치는 특이한 대상일수록 예술가의 관심을 끈다. 관습을 넘어서기 위해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혼종을 시도한다. 그런 점에서 괴물은 상상력의 축복이자, 다양성의 증거이자, 예술성으로 충만한 존재이다. 오늘도 많은 예술가가 괴물 같은 작품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피카소의 미노타우로스 그림들은 여러 면에서 특이하다. 피카소의 그 많은 미노타우로스 그림 중에 상처 입은 미노타우로스가 있다. 거기서 미노타우로스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괴물이라기보다는 연민을 자아내는 약자로 재규정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노타우로스는 자기 정체성 안에 있는 ‘괴물성’을 나타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18세기 프랑스의 백과전서파 지식인 디드로가 “괴물성은 자기 안에 있다”고 한 것처럼, 피카소는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이용해서 일종의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자기 안에도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괴물이라고 경원시했던 상대에 대해서도 좀 더 너그럽게 된다. 나는 정상이고, 너는 괴물이란 이분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자신은 괴물을 죽이는 영웅 테세우스이고, 너는 죽어 마땅한 괴물이라는 이분법은 미성숙한 것이다.
괴물이 애당초 자신을 괴물이라고 여기겠는가. 남들이 자신을 괴물이라고 부를 때, 괴물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 아니에요, 저는 당신과 같은 인간이에요. 저를 죽이지 말고 함께 놀아주세요, 라고 애원하는 선택이 있다. 둘째, 그렇군요, 전 괴물이군요. 전 괴물답게 굴겠어요, 라고 자기 비하에 빠지는 선택이 있다. 셋째, 괴물이란 결국 누군가 정상인이 되고 싶어 자신에게 덧씌운 이름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는 선택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몽테뉴는 모두 괴물이라는 것은 인간 인식의 산물일 뿐, 신의 관점에서 보면 괴물이란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누가 새삼 괴물이라는 명칭을 필요로 하는가. 모두가 정상인이면 괴물이라는 이름이 필요치 않을 것이고, 모두가 괴물이어도 괴물이라는 이름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괴물은 결국 구별의 기제이다. 괴물은 소심한 ‘정상인’이 꾸는 악몽이다. 괴물의 악몽에 시달리는 이에게 장자의 호접몽을 권한다. 나는 나비 꿈을 꾸는 장자인가, 아니면 인간 꿈을 꾸는 나비인가. 나는 괴물 꿈을 꾸는 정상인인가, 아니면 정상인 꿈을 꾸는 괴물인가. 이 질문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은 좀 더 말랑말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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