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는 공공요금을 짓누르는 인기 위주의 정책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국민께 참아 주십사 할 것은 참아 달라 말해야 합니다. 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국민 부담만 줄여서 국가를 운영할 수 없습니다.”
7일 국회에서 열린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한덕수 국무총리는 ‘난방비 폭등에 대해 총리로서 사과하라’는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의 질타에 작심한 듯 이같이 말했습니다.
“그럼 정부는 왜 존재하느냐”는 서 의원의 반발에 한 총리는 “포퓰리스트 정권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필요한 지출을 포퓰리즘이라 하지 않는다. 능력도 없으면서 빚을 얻어 국민에게 인기를 얻는 정책을 하면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최근 난방비 폭등 대책으로 7조5000억 원어치 ‘에너지 물가 지원금’을 나눠주자고 제안한 것을 ‘포퓰리즘’이라며 일축한 것입니다.
정치권에선 설 연휴가 끝난 뒤부터 ‘난방비 지원금’ 공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켜보고 있자니 딱 3년 전 이맘때의 ‘코로나 재난지원금’ 논란이 떠오릅니다. 돌이켜보면 그 때와 지금, 패턴이 똑같습니다.
대형 선거(그때는 대선, 지금은 총선)를 1년여 앞두고 이재명이 먼저 ‘다 주자’고 던집니다. 곧장 여야를 불문하고 ‘경기도 차베스’, ‘독불장군식 매표정치’ 등 온갖 비판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이재명에게 집중된 뒤입니다. 선거를 앞두고 거부하기 힘든 유혹에 결국 다른 정치인들도 불나방처럼 달려듭니다. 서로 ‘내가 더 주겠다’라는 말 잔치 속에서 이슈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무책임한 경쟁만 남고 그에 따른 결과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입니다.
● 2020년의 코로나 지원금
시계를 잠시 3년 전 코로나 시국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재명은 코로나 재난지원금 이슈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정치인이었습니다. 2020년 코로나가 터지자 ‘1차 재난기본소득’으로 경기도민 1293만여 명에게 1인당 10만 원씩 2조 원 넘게 쏘면서 시작됐죠.
여론을 등에 업은 그는 같은 민주당인 문재인 정부의 선별 지급 기조에도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재난지원금을 소득 하위 일부가 아닌 전 국민에게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거죠.
그는 2020년 8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모든 국민에게 지역화폐로 개인당 30만 원 정도를 지급하는 것이 적당하다”, “(선별 지급은) 헌법상 평등 원칙을 위반해 국민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고, 보수야당의 선별복지 노선에 동조하는 것이다. (중략) 민주당이 보편복지를 주장하다가 갑자기 재난지원금만은 선별복지로 해야 한다니 납득이 안 된다”는 등 여러 차례 전 국민 지급을 강조했습니다. 당시 그의 주장대로 전 국민에게 나눠주려면 약 15조 5520억 원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됐습니다.
대선이 1년 여 앞으로 다가오자 그는 본격 ‘마이 웨이’를 가기 시작합니다. “정부의 방역 상황을 고려해 달라”는 정부와 당의 만류에도 2021년 1월 기자회견을 열어 “모든 경기도민에게 지역화폐로 10만 원씩 2차 재난기본소득을 주겠다”고 발표했죠. 점잖기로 유명한 정세균 당시 국무총리마저 “급하니까 ‘막 풀자’는 건 지혜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라고 지적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민주당 일각에서 지역 간 형평성 및 방역 활동 장애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라며 “그러나 방역에 장애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근거를 찾기 어려웠고, 지방정부마다 각자 특색과 철학에 따라 경쟁하며 배워가는 것이 지방자치제”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러고는 외국인 40만 명까지 포함한 도민 1346만여 명에게 1조3464억 원을 지급했습니다.
그해 여름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습니다. 당시 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로 나섰던 그는 “소득 하위 88%에게만 주겠다”는 문재인 정부에 본격 각을 세우며 “경기도는 나머지 12%까지 포함해 전원에게 25만원씩 지급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렇게 전 국민 평등 지급을 강조하던 그는 지자체 간 평등에는 유독 무심했습니다. 당시 경선에서 경쟁했던 이낙연 후보는 “다른 시·도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된다. 형평성이 손상됐다”라고 우려했고, 김두관 후보도 “재난지원금을 못 주는 다른 시·도의 박탈감도 생각해야 한다”라고 지적했죠. 하지만 이재명 후보는 “경기도민의 의사와 세금으로 자체 결정한 것”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야권 후보였던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지사 찬스’를 내려놓고 ‘도청 캠프’를 해체하라”라며 경기도지사로서의 권한을 남용한 ‘매표 정치’를 비판하자 “그럼 정부도 매표행위 중이냐”고 역으로 따졌습니다. 역시 ‘맷집’은 최고입니다. 결국 이재명의 경기도는 나머지 12%에 해당하는 도민 252만여 명에게 5746억 원 이상 나눠줬습니다.
코로나 시국 내내 재난지원금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의 차별화에 성공했습니다. 줄곧 당의 아웃사이더, 비주류로 분류되던 그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경선에서 승리해 민주당의 공식 대선 후보까지 됐으니까요.
결코 밑지지 않는 장사라는 걸 지켜본 정치권도 본격적으로 퍼주기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민주당 소속 박남춘 당시 인천시장은 2021년 10월 “인천시민 1인당 10만 원씩 주겠다”라고 했고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경기도의 100% 재난지원금 지급 결정 이후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들의 차별 없는 지급 결정이 계속되고 있다”고 썼습니다), 충남도도 도민 100% 지급을 결정합니다.
국민의힘도 질 수 없죠. 이들은 아예 ‘묻고 더블로’ 갔습니다. 대선이 임박해 이재명이 25조 원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꺼내 들자 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은 50조 원으로 소상공인·자영업자를 지원하겠다고 맞불을 놨습니다. (그런데 이 50조 원, 어디 갔나요?)
● 2023년의 난방비 지원금
다시 2023년입니다. 이제 민주당 대표로서 내년 총선뿐 아니라 자신의 사법리스크 부담까지 함께 지게 된 탓인지 이재명은 또 한 번 ‘지원금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설 연휴 다음날인 1월 26일 민주당 소속 지방정부 및 의회 관계자들을 국회로 불러 모은 그는 소득별로 4인 가구 기준 최대 100만 원씩 ‘에너지·물가 지원금’을 나눠주자고 제안합니다. 소득 하위 30%에게 1인당 25만 원, 30~60%에겐 15만 원, 60~80%는 10만 원씩 주자는 겁니다. 무려 7조 5000억 원어치입니다. 이를 위해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편성하고, 기업에 ‘횡재세’를 걷자고 했죠.
이에 대해 정부는 “안 그래도 물가가 고공행진 중인데 추경으로 돈을 풀면 물가만 더 뛸 것이고, 건전재정 기조에도 맞지 않다”고 난색을 표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표가 쏘아 올린 공은 이번에도 정치인들의 경쟁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습니다. 정부 대책과 별도로 지방자치단체들마다 각자 난방비 지원금을 주겠다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경기 파주시가 “소득격차에 상관없이 모든 가구에 20만 원씩을 지급하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산은 추경으로 마련했습니다.
감격한 이 대표는 5일 국회로 김경일 파주시장을 불러 공개적으로 격려하며 “파주시처럼 전체 예산이 중앙정부의 300분의 1밖에 안 되는 지방정부도 국민을 도우려고 애쓰는데 중앙정부가 이를 못 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대통령과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국민의 난방비 고통을 덜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파주시의 재정자립도는 28%로, 경기도 31개 시·군 가운데 21위입니다. 국민의힘 소속인 고준호 경기도의회 의원은 최근 YTN 라디오에서 “파주시의회에는 관련 돈을 지원할 조례조차 아직 없다. 정말 시민들을 위한 정책인지, 아니면 파주시장 본인을 홍보하려고, ‘전국 기초지자체 최초 지원’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서두른 건지 모르겠다”라고 했습니다. 소요 예산 444억 원에 대한 우려도 쏟아냈습니다. 그는 “444억 원이면 막대한 재정이다. 그런데 과연 파주시 재정이 넉넉하냐”며 “급하더라도 순차적으로 순서에 맞게 저소득층, 취약계층에 대해 난방비를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민주당이야 이제 야당이니 저런다 쳐도,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건 이재명이 ‘또 ’쏘아 올린 경쟁 구도에 휘둘리는 정부·여당입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도전했던 조경태 의원이 지난달 26일 가장 먼저 “추경을 편성해 전 가구에 3개월간 10만원씩 지급하자”고 사실상 이 대표 주장을 거들고 나섰죠.
민주당 소속 평택시 시의원들이 평택시 차원의 긴급지원책을 요구하니 이에 질세라 국민의힘 소속 안성시의회 의원들도 정부 지원 외 수백억 원 규모의 지원을 주장했습니다. 지난달 30일엔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 에너지 취약계층뿐 아니라 중산층 서민의 난방비 부담을 낮출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제 고작 2월인데, 올해 예산 집행을 막 시작한 재정 당국만 곤혹스럽게 됐습니다. 당장 도움이 시급한 취약계층은 당연히 지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확한 비용 예측이나 이를 위한 논의 과정은 생략해버린 채 지금처럼 경쟁하듯 ‘일단 내가 더 주고 보자’는 식은 말 그대로 인기영합주의입니다. 이미 3년 전 코로나 지원금 때 우리 모두 지켜본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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