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어제 방한한 기시다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입장은 흔들리지 않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이와 관련한 기자의 질문에 “저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기시다 총리의 과거사 언급은 3월 윤 대통령 방일 때 직접적 반성과 사과 표명 없이 1998년 한일 공동성명(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상기하는 수준의 우회적 언급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한 걸음 진전된 유감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국내 보수파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소수 파벌 출신의 총리라는 국내 정치적 한계 속에서 개인적 심정 피력 수준에서나마 한국의 선제적 관계 복원 조치에 호응해 직접 화답하려는 노력을 보여준 셈이다.
그럼에도 기시다 총리는 일본 정부가 이미 25년 전 공식 표명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직접 밝히지 않았다. ‘혹독한 환경’을 만든 책임 주체에 대한 언급도 없이 개인적 생각을 밝히는 것으로는 한일 간 깊은 인식의 간격을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한일 정상이 19∼21일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때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하기로 한 만큼 기시다 총리의 보다 전향적인 인식 표명을 기대해 본다.
사실 한일 간엔 과거사 갈등을 이유로 관계 진전을 외면할 수 없는 긴급 현안이 수두룩하다. 북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한 안보 공조와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따른 경제·기술 협력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당초 G7 정상회의 이후로 예상되던 기시다 총리의 방한이 앞당겨져 윤 대통령 방일 52일 만에 이뤄진 것에도 한미 간 밀착 속도에 맞춰 신속히 한일, 한미일 공조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일본 측의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도 한미 ‘핵협의그룹(NCG)’에 향후 일본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는다며 배려의 제스처를 보여줬다.
한일 관계가 복원 과정에 들어선 것은 윤 대통령이 국내 반발을 무릅쓰고 선제적 해법을 내놓은 데 따른 한일 정상 간 신뢰 구축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기시다 총리의 유감 표명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하지만 그간 기복 많은 한일관계사에서 보듯 과거사에 대한 근본적인 화해 없이는 봉합과 갈등을 되풀이하는 도돌이표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민심 요동이나 정권 교체에도 궤도 이탈 없이 굳건하게 미래 협력의 길을 이어가기 위해선 정상 간 신뢰를 뛰어넘는 국민 간 화해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선행 조건은 일본의 인식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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