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한국 내정에 간섭하는 듯한 발언으로 한중관계에 파문을 던졌다.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지는 쪽에 베팅하는 것은 한국의 잘못”이라는 싱 대사의 발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됐다. 우선 외교관으로서 주재국 정치에 관여하는 듯한 발언은 극히 부적절하고 무례하다. 두 번째는 그의 현상 분석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싱 대사는 마치 한국이 미국 주도의 반중(反中) 동맹에 합류한 것처럼 얘기했다. 엄밀히 말해 한국은 반중 동맹에 합류한 적이 없고, 현재로선 그럴 의지도 없어 보인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한중관계 급랭? 뒤늦은 호들갑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동맹은 목적에 따라 크게 국력집합동맹과 안보-자주성의 교환동맹으로 나뉜다. 한국이 전시작전통제권을 매개로 미국의 보호를 받았던 과거 한미동맹이 안보-자주성의 교환동맹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미국이 구축하는 반중 동맹 체제는 중국이라는 공동 적에 맞서기 위한 국력집합동맹이다. 어느 나라가 국력집합동맹에 합류했다고 하려면 적어도 그 동맹이 추구하는 경제적 디커플링이나 군사 협력에 참여하는 최소한의 징후가 보여야 한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한국은 반중에 가까운 정치적 수사를 쏟아내고 있지만, 경제·안보적 실질 조치를 통해 반중 동맹에 합류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최근 국내 언론보도에 ‘한중관계 급랭’이라는 표현이 자주 보인다. 현재 국제정치적 상황에 비춰 보면 맞지 않는 얘기다. 이미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 새로운 냉전체제가 구축됐고, 역내 정세는 냉각기에 접어든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10년 전부터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양국 대결의 최전선인 동북아시아는 다시금 냉전에 돌입했다고 봐야 한다. 이제야 한중관계가 급랭됐다고 얘기하는 것은 동토에서 남들은 모두 방한용품을 갖추고 추위를 견디는 와중에 “갑자기 날이 추워졌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과 다름없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애써 외면한 채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로 지냈다. 최근 중국이 강경한 태도로 압박을 본격화하자 그제야 국제사회에 추위가 온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하지만 추위가 온 것을 인지하고도 정부와 정치권에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국내 언론 대부분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지만, 서태평양 지역은 6월 초부터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를 맞고 있다. 신냉전 구도가 명확해지면서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두 진영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군사력을 과시하며 대치 중이다. 북·중·러 삼각동맹과 미·일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 동맹 간 군사적 대치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펼쳐졌다. 국내 정치권이나 언론, 심지어 군 당국도 이에 대해 무심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중·러, 역대 최대 ‘공중전략순찰’
두 진영의 군사적 대치는 6월 2일 제주 남방 해역에서 시작됐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미국과 호주, 캐나다 해군 전력을 초청해 동중국해에서 대규모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당초 훈련은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7000t급 구축함 ‘시라누이’를 투입했다. 미 해군에서는 이지스 구축함 ‘청훈’이 참가했다. 호주 해군은 ‘안작’ 호위함을, 캐나다 해군은 ‘몬트리올’ 호위함과 ‘아스테릭스’ 군수지원함을 투입했다. 이들이 제주 남방 해역에서 연합 전단을 구성해 무력시위를 벌이자 중국도 맞불을 놓았다. 중국 해군은 함명 미상의 052DL 방공구축함과 056A형 초계함, 901형 군수지원함으로 구성된 전대를 꾸려 4개국 연합 전단의 가시거리까지 접근하게 했다. 양측 해군 전력의 대치 상황은 6월 중순까지 알려지지 않다가 캐나다 해군 관계자가 6월 10일 즈음 사진을 공개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그런데 중국의 대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국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제6차 합동공중전략순찰’이라는 이름의 무력시위를 6월 6~7일 실시했다. 한국 언론이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우리 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범했다”고 보도한 사건이 바로 이 무력시위다. 중국, 러시아 폭격기가 동원된 합동공중전략순찰은 2018년부터 여러 차례 실시됐지만 이번이 역대 최대 규모였다.
이번 무력시위에 나선 중국 측 주력은 안후이성 안칭 공군기지에 주둔하는 동부전구 예하 제10폭격기사단 제28연대 소속 H-6K 폭격기였다. 평상시에도 제주 남방 해역에 자주 출몰하는 부대다. 오키나와 일대에서 종종 대함 타격 훈련을 실시하면서 미군·일본 자위대 전투기들과 대치하는 전력이다.
이 부대의 주 임무는 항공모함(항모) 타격이다. 유사시 중국이 자체 개발한 초음속 대함미사일 YJ-12를 적 항모에 날리는 것이다. H-6K 폭격기 1대가 6발의 YJ-12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다. 이 미사일의 사거리는 400㎞, 비행속도는 마하(음속) 4에 달해 요격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일본 항공자위대가 촬영한 사진을 분석해보면 중국 폭격기들은 대함 타격 임무 때 YJ-12 미사일의 세트라고 할 수 있는 전자전 포드를 장착한 채 비행했다. 이번 공중 순찰 과정에서 제주 남방 해역에 몰려 있던 미 항모들을 모의 타격하는 대함 공격 훈련을 실시했을 개연성이 크다.
러시아 측 전력도 심상치 않다. 러시아군은 아무르주 우크라인카 공군기지에 주둔하는 제326중폭격기사단 제182근위중폭격기연대 소속 Tu-95MS 전략폭격기를 동원했다. 제326중폭격기사단은 동부군관구에 대한 전략 지원을 맡은 부대다. 그중에서도 제182근위중폭격기연대는 지상 공격을 전담하고 있다. 이들의 주 무장은 Kh-101·102와 Kh-55 공대지순항미사일이다. Kh-101·102와 Kh-55는 핵탄두가 탑재된 전략핵미사일이다. 이번 무력시위에 동원된 양국군 폭격기 성능과 소속 부대 특성을 고려했을 때 중국 폭격기는 대함 타격을, 러시아 폭격기는 지상 표적 타격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원잠, 전략폭격기도 훈련 동참
중국과 러시아가 합동공중전략순찰을 실시하던 6월 6일과 7일, 제주 남방 해역(동중국해)에는 엄청난 규모의 서방 연합 함대가 집결했다. 항모로 분류할 수 있는 군함만 4척이 포함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6월 7일 필리핀해에 있던 미 해군 로널드 레이건 항모 전단과 니미츠 항모 전단이 잇달아 동중국해로 투입된 것이다. 이들 전단에는 이지스 순양함 벙커힐, 로버트 스멀스, 앤티텀과 이지스 구축함 디케이터, 청훈, 라파엘 페랄타, 웨인 E. 메이어 등 이지스함 7척이 배속됐다. 다른 나라 해군 함대의 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 해상자위대에서는 최근 F-35B 전투기를 탑재하기 위한 개수를 마친 경항모 이즈모와 구축함 사미다레가 눈에 띄었다. 여기에 캐나다 해군 호위함 몬트리올, 프랑스 해군 구축함 로레인도 합류했다. 이들 해상 전력 근처에는 앞서 함께 훈련을 실시한 일본 해상자위대 구축함 시라누이와 미 해군 강습상륙함 아메리카, 호주 해군 호위함 안작도 배치됐다. 미국이 주도하는 ‘반중 동맹 함대’가 동중국해에서 세를 불리자, 중국도 055형 구축함 안산과 054A형 호위함 린이를 투입해 기존 수상함대에 합류하게 했다.
미국이 이끈 연합함대는 사흘간 제주 남방 해역에서 무력시위를 하다가 흩어진 뒤, 6월 11일 필리핀해에서 다시 뭉쳤다. 이 무력시위에는 6월 16일 한국 부산항에 입항하기 전 인근 해역을 지나던 미 해군 순항미사일 탑재 원자력 잠수함 미시간도 참가했다. 연합함대가 필리핀해에서 진용을 갖춘 6월 12일 미국은 본토의 B-52H 전략폭격기 2대를 연합함대 상공에 투입했다. 이들 전략폭격기는 미국 미놋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제23폭격비행대 소속 기체다. 유사시에 합동장거리공대지미사일(JASSM)과 장거리대함미사일(LRASM)을 투발하는 것이 핵심 임무다. B-52H 폭격기가 연합함대 상공에 투입됐을 때 이 함대는 ‘대량 사상자 대응 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에 참가한 함대 규모와 B-52H의 등장, 대량 사상자 발생에 대비한 훈련 등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이들 연합함대가 필리핀해에 집결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해상 전력이 유사시 중국 해군과 일대 결전을 상정한 ‘함대 결전 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2주 가까이 진행된 이 훈련에 미국을 위시해 일본, 호주, 캐나다, 프랑스가 참가했다. 미국의 태평양 지역 핵심 동맹국이 대거 모였고, 지구 반대편 프랑스까지 주력 전투함을 보내 힘을 보탰다. 그런데 이번 연합훈련에 참가한 국가들 면면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자 인도·태평양 전략의 ‘린치핀’인 한국은 왜 참가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제주 남방 해역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이 중국, 러시아와 대치했음에도 한국은 연합훈련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 당국은 중국, 러시아가 폭격기를 동원하는 사실상의 전략적 도발을 했음에도 ‘군용기의 방공식별구역 침범’ 정도로 그 의미를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국제 정세의 거대한 흐름은 한국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압도적 국력을 가진 두 강국의 틈바구니에 낀 나라가 가진 선택지는 어느 한 편에 서서 안전을 보장받는 것뿐이다. 이미 신냉전의 활시위는 당겨졌다. 한국은 미국과 가치·이익을 공유하는 동맹이다. 지금은 좌고우면할 때가 아니다. 세계 각국이 이미 편을 나눠 대치하기 시작한 가운데 피아 구분을 못 한 채 박쥐 같은 행태를 보여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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