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 사물에 담긴 이야기 담아
산문집 ‘또 못 버린 물건들’ 펴내
“오래된 것들이 지금의 내가 됐다”
모 은행 로고가 그려진 푸른색 볼펜 한 자루는 은희경 작가(64)에게는 ‘못 버릴 물건’이다. 5년 전 문학 행사가 끝난 뒤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10년 만에 만난 한 선배 시인이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볼펜 한 자루를 꺼내 건넸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그에게 시인이 말했다. “너무 반가워서.” 그 볼펜과 함께, 그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잠들곤 했던 청춘의 나날들이 그에게 다시 왔다. 은 작가는 “나를 소설가로 이끌어준 시심(詩心)이 깃든 볼펜”이라며 “손에 꼭 쥐었던 그 볼펜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12년 만에 산문집 ‘또 못 버린 물건들’(난다)을 출간한 은 작가를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산문집엔 그가 일상 속 사물에 관해 쓴 글 22편이 담겼다. 모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3년간 썼다. 그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기능적으로만 느꼈던 물건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며 “지금의 나를 말해주는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물건 속엔 매일 조금씩 변화해온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는 2002년 미국 워싱턴주립대 객원연구원으로 시애틀에 머물 때 구매한 3달러짜리 구둣주걱을 애용했다. “코끼리 상아로 만든 구둣주걱이 미적으로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시애틀의 한 동물원에서 아기 코끼리를 마주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내가 그동안 코끼리 몸의 일부를 구둣주걱으로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순간”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날 이후 상아로 만든 구둣주걱을 볼 때마다 되묻는다. ‘상아로 만든 구둣주걱, 이대로 좋은가.’
그는 “오래된 물건들과 함께 조금씩 변해가면서 지금의 내가 됐다”고 했다. ‘타인에게 말 걸기’(문학동네·1996년) 속 단편 ‘먼지 속의 나비’의 주인공은 아끼던 몽블랑 만년필을 화장실에 빠뜨린 뒤 어렵사리 꺼내지만, 무언가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만년필을 버린다. 반면 ‘중국식룰렛’(창비·2016년)에 실은 단편 ‘장미의 왕자’는 손님이 카페에 놓고 간 몽블랑 수첩을 보관하는 점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여기엔 수첩을 수차례 잃어버리고, 잃어버렸던 볼펜을 가까스로 되찾았던 그의 경험이 반영됐다.
“이제는 물건 하나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조금 더 기다리고 여지를 주는 사람이 됐어요. 이야기도 마찬가지예요. 단언하기보다 여지를 주는 이야기가 쓰고 싶어요.”
이처럼 그가 물건을 못 버리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소설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에 기억을 다 간직하려 한다”고 했다. “소설로 쓰지 왜 아깝게 산문으로 냈느냐”는 후배 작가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런 거 또 많아.”
은 작가는 내년 봄부턴 계간 문학동네에 장편소설을 연재할 계획이다. 어떤 이야기일까.
“왔다 갔다 해요. 연애 소설을 쓸지, 몸에 관한 이야기를 쓸지.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늘 그렇듯 내 길을 찾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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