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가 사과 속을 파고들 듯 우리 영혼 속을 파고들어 자아정체감을 좀먹고 살아갈 이유를 빼앗아가는 병.’ 20년 넘게 우울증과 싸워온 영국의 정신과 의사 린다 개스크는 우울증을 이렇게 설명한다. 의학 전문가답게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했는데도 고립감, 불안감, 절망감, 생기 고갈, 자기 비하 같은 부정적 감정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밤마다 베개를 땀과 눈물로 적시며 잠드는 날이 계속됐다”고 했다.
▷‘마음의 감기.’ 우울증은 누구나 감기처럼 겪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 증세까지 감기처럼 가볍게 봐선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증으로 만성화하면 뇌의 구조까지 변형시키고 극단적 자해나 자살로 치닫게 되는 게 우울증이라는 것이다. ‘정신운동지연’이라 불리는 극도의 무기력증이 육체마저 약화시킨다. 장기간 이 질병과 싸워온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나는 평생 ‘검은 개(black dog)’ 한 마리를 데리고 살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국내 우울증 환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한시적으로 우울감을 느끼는 수준을 넘어 병의원에서 상병코드가 F32, F33인 우울증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다.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가 확연하다. 연령별로 20대(18.6%)와 30대(16%)가 가장 많은데, 경쟁이 치열한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와 불안의 강도가 그만큼 세다는 의미일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코로나 블루’ 환자도 크게 늘었다. 젊은이들이 정신과 진료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비교적 적극적으로 진단과 치료에 응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우울증 환자는 여성이 67만여 명으로 남성보다 2배 이상 많다. 특히 20대 여성의 증가세가 가팔라서 지난해에만 12만 명 넘게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과거 갱년기 우울증 등의 이유로 중장년 여성 환자가 많던 것과는 달라진 흐름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인생 단계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취업의 벽은 높고 기업 문화는 여전히 불리한 게 현실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증폭시키는 SNS 활동, 외부 자극이나 변수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여성호르몬 등 다양한 이유들이 거론된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뉴스는 기성세대엔 낯설다. 고령화시대에 정작 관심을 쏟아야 하는 문제는 노년기 우울증 아니냐는 항변도 나온다. 그러나 나이 외에도 유전, 주변 환경과 경험, 가족력 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는 게 우울증이다. “의지로 이겨내라”는 식의 어설픈 조언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과도한 경쟁과 비교 문화 등 우울증을 악화시키는 우리 사회의 스트레스 요인들을 해소하는,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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