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선 출신’들이 망쳐버린 한국정치 [김지현의 정치언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9일 14시 00분


“우리가 선거 때마다 너무 ‘뉴페이스’에만 집착했던 탓은 아니었을까.” 지난주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끝내 부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0월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이 재적 298인, 총투표수 295표, 가결 118표, 부결 175표, 기권 2표로 부결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를 열고 당론으로 부결을 결정했다. 뉴스1
10월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이 재적 298인, 총투표수 295표, 가결 118표, 부결 175표, 기권 2표로 부결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를 열고 당론으로 부결을 결정했다. 뉴스1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였다는 20대 대선의 후폭풍이 1년 반이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해 3월부터 지금까지 정말 진절머리 나는 ‘네버엔딩 대결’을 벌이는 중이죠. 윤 대통령은 유례없는 ‘제왕적 통치’를 이어가면서 때아닌 ‘이념 전쟁’을 선포하는가 하면, ‘인사 참사’라는 여론 비판에도 꿋꿋하게 지인들로 내각 요직을 채우고 있습니다. ‘사법리스크’ 속 자해적 단식을 이어가던 이 대표는 건강 문제를 호소하며 재판은 80분 만에 마치더니 곧장 택시를 타고 국회 본회의장으로 이동해 당 의원들과 ‘셀카’도 찍었더군요.

아무리 봐도 지도자감은 영 아닌 듯한 두 사람을 필두로, 여야도 법안과 인사, 정책에서 번번이 정면충돌하며 유례없는 정쟁을 이어가는 중이죠. 앞으로도 국정감사에 보궐선거에 총선까지 여야가 부딪힐 일만 남았으니 분위기 반전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9월 26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제75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모습. 윤 대통령 뒤로 ‘힘에 의한 평화’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동아일보 DB
윤석열 대통령이 9월 26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제75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모습. 윤 대통령 뒤로 ‘힘에 의한 평화’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동아일보 DB
단식 투쟁 후 입원 치료 중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0월 6일 오후 건강 문제를 호소하며 80분 만에 재판 종료를 요청한 뒤 국회 본회의장에 깜짝 등장해 임오경 등 민주당 의원들과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뉴시스
단식 투쟁 후 입원 치료 중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0월 6일 오후 건강 문제를 호소하며 80분 만에 재판 종료를 요청한 뒤 국회 본회의장에 깜짝 등장해 임오경 등 민주당 의원들과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뉴시스
요즘 원로 정치인들을 만나보면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두 사람이 나란히 여야 대선 후보가 된 뒤로 한국 정치판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공통된 우려가 나옵니다. 정치권이 선거철이 임박해서야 부랴부랴 ‘세대교체’와 ‘물갈이’를 외치며 새 얼굴 찾기에만 급급했던 탓에, 준비가 전혀 안 된 사람들을 무리하게 간판으로 내세웠고, 그 결과가 한국 정치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겁니다.

윤 대통령이 정치판에 발을 들인 것은 2021년 3월 검찰총장직을 던지면서죠. 정치 경력이 대통령 재임 기간 1년 반을 포함해 3년이 채 안 되는 셈입니다. 평생 검사만 했던 윤 대통령은 재임 초반에는 ‘도어스테핑’ 등 이전 대통령들과 다른 소통을 시도했지만, 결국 ‘주 120시간 근무’, ‘아프리카 비하 발언’ 등 ‘1일 1설화’ 논란을 일으키면서 정치 아마추어로서의 한계를 고스란히 노출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들어서며 ‘도어스테핑’을 하는 모습. 윤 대통령이 새로운 소통을 하겠다며 취임 이틀 차부터 시작했던 도어스테핑은 결국 각종 설화와 논란 속 6개월 만에 중단됐다. 동아일보 DB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들어서며 ‘도어스테핑’을 하는 모습. 윤 대통령이 새로운 소통을 하겠다며 취임 이틀 차부터 시작했던 도어스테핑은 결국 각종 설화와 논란 속 6개월 만에 중단됐다. 동아일보 DB
이 대표도 대선 전까진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등 지자체장 경험만 있었고 국회의원 등으로 중앙정치 무대에서 뛰었던 적이 없었죠. 이 때문에 민주당 내에서 줄곧 변방 출신 비주류로 분류돼 왔습니다. 이 대표 역시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SNS를 이용한 지지자들과의 직접 소통 등을 내세워 기존 여의도 문법을 깨는 파격 행보를 선보였지만, 이처럼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가 결국 당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개딸’(개혁의 딸) 사태를 불러일으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경기도지사이던 2021년 7월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공개한 14분 11초 분량의 대선 출마 선언 영상. 당시 대선 주자 중 이 대표만 유일하게 영상으로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 유튜브 화면 캡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경기도지사이던 2021년 7월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공개한 14분 11초 분량의 대선 출마 선언 영상. 당시 대선 주자 중 이 대표만 유일하게 영상으로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 유튜브 화면 캡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등판 이후 정치판도 점점 양극단을 향해 달리는 중입니다. 여야 모두 남은 건 30% 안팎의 강성 지지층뿐이고 ‘양쪽 다 싫다’는 무당층 비율이 여야 지지율과 비슷하거나 때로는 더 높은 심각한 정치 혐오가 이어지고 있죠.

이 여파가 국회로 번지면서 의회정치도 실종된 상태입니다. 사실 저도 정치부 기자가 되기 전까지는 국회의원들이 허구한 날 만나서 싸움만 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습니다만, 요즘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단 만나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서로 좋든 싫든 만나서 치열하게 협상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양보와 협치의 미덕도 발휘되는 것이 의회 정치인데, 지금은 그런 기본적인 룰조차 사라진 채 서로 상대를 카운터파트너로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거죠.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원래 원내대표든, 상임위원장이든 협상하다 틀어져서 파행되더라도, 어떻게든 따로 만나 술잔이라도 기울이며 다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여야 간 관례이자 국회의 전통이었는데 지금은 서로 안 내키면 바로 ‘보이콧’을 해버리지 않느냐”며 “정치가 그렇게 쉽게 자기 것만 얻으려 하는 과정이 아닌데 분명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2020년에만 해도 야당이던 국민의힘(당시 미래통합당) 주호영 당시 원내대표가 원 구성을 두고 대치를 벌이다 칩거에 들어갔을 때 민주당 김태년 당시 원내대표가 강원도 고성군의 한 절까지 찾으러 갔던 적도 있었죠. 그때도 물론 여야가 최악의 원 구성 협상을 이어가느라 개원도 못 한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아예 서로 만나지조차 않는 윤석열-이재명 조합보다는 나은 듯합니다.

2020년 6월 강원 고성군 화암사에 칩거 중이던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오른쪽, 당시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을 찾아간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의원(오른쪽에서 세 번째,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과 김영진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 당시 원내수석부대표)이 절에서 함께 내려오고 있다. 김태년 의원 페이스북
2020년 6월 강원 고성군 화암사에 칩거 중이던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오른쪽, 당시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을 찾아간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의원(오른쪽에서 세 번째,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과 김영진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 당시 원내수석부대표)이 절에서 함께 내려오고 있다. 김태년 의원 페이스북
윤석열-이재명 두 사람은 주변 참모진의 조언을 잘 듣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비슷합니다. 윤 대통령은 여권 내부의 반대에도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을 사면까지 시켜가며 사실상 국민의힘 강서구청장 후보에 앉혔죠. 이 대표 역시 최측근들의 거듭된 반대를 무릅쓰고 지방선거와 전당대회에 직접 출마한 탓에 아직도 ‘방탄’ 꼬리표가 따라다닙니다. 이번 체포동의안 표결을 앞두고도 주변 만류에도 자신의 불체포특권 포기 선언을 뒤집고 사실상 부결을 요구한 것이 오히려 당내 가결표 ‘반란’을 부추겼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왼쪽)와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당시 원내대표)이 올해 5월 박 의원의 원내대표 선출 직후 국회에서 회동하며 인사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의회정치 복원’을 강조하며 쟁점이 없는 법안은 신속 처리하기로 뜻을 모으고 매주 월요일 식사 회동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가결 여파로 박 의원이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하면서 여야 협치도 당분간 난항을 겪을 것이란 전망이다. 동아일보 DB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왼쪽)와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당시 원내대표)이 올해 5월 박 의원의 원내대표 선출 직후 국회에서 회동하며 인사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의회정치 복원’을 강조하며 쟁점이 없는 법안은 신속 처리하기로 뜻을 모으고 매주 월요일 식사 회동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가결 여파로 박 의원이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하면서 여야 협치도 당분간 난항을 겪을 것이란 전망이다. 동아일보 DB

결국 본질에 대한 개혁 없이, 겉으로 보이는 간판만 대충 갈아 끼워 ‘혁신’을 빙자하려던 정치권의 얕은꾀가 스스로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초유의 ‘0선’ 간 대결에서 국민이 기대했던 건 기성 기득권 정치판에 대한 쇄신과 변화였건만, 결과적으로 정치의 기본 ABC조차 무시하는 사람들이 대신 나타나 그나마 남아있던 최소한의 미덕과 관행마저 없애버린 겁니다.

이들의 독주를 제어하고, 제 목소리를 냈어야 할 국회의원 중에 오히려 이들의 인기영합주의에 편승해 ‘행동부대’를 자처하며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는 ‘기회파’들도 적지 않죠. 오죽하면 박지원 정동영 천정배 등 이미 한참 전 현역에서 물러났어야 할 OB 들마저 “이 정도면 나도 다시 해볼 만하겠다”며 줄줄이 다시 등판하겠습니까. 세대교체를 외치며 등판한 이들이 오히려 세대 역행을 유발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인 겁니다.

한 야권 인사는 “세대를 교체하고 청년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해서 뽑은 게 결국 김남국 아니냐”며 “오로지 나이로만, 신선함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게 지난 총선과 대선 결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음 선거 때는 겉으로만 보이는 변화에 현혹되지 말고 제대로 된 사람을 찾고 응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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