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30년 가까이 꾸준히 썼죠. 한 100편 정도 쓰다 보면 언젠가 당선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버텼습니다.”
202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 임택수 씨(55)는 50대의 뒤늦은 등단이 멋쩍다는 듯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는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학사, 프랑스 폴 베를렌 메스대 불문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당선 소식을 주위에 전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많이 울더군요. 소설을 쓸 기회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고생했다고요. 사실 이미 현장에서 글 쓰고 있는 문인 친구들도 많습니다. 늦었지만 그동안 하던 대로, 수행하듯 써나가겠습니다.”
신춘(新春)의 바람이 꼭 청춘에게만 불어온다는 법이 있을까. 지난해 12월 21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올해 신춘문예 당선자 9명은 모두 30∼50대다. 중편소설 이상민(42), 시 한백양(본명 이상정·37), 시조 고은산(본명 고완수·56), 희곡 소윤정(50), 시나리오 정한조(59), 동화 이정민(45), 문학평론 황녹록(본명 황정화·53), 영화평론 민경민(본명 황경민·34) 씨다.
올해 당선자의 평균 연령은 47.9세로 2022년(37.4세)과 2023년(34.8세)보다 10세 이상 높다. 만추(晩秋)에 이르러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꺼내 보인 이들은 당당하게 “삶의 고통과 슬픔을 관통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고 외쳤다. 이날 영하 13도의 한파가 몰아쳐 몸은 꽁꽁 얼었지만, 당선자들의 표정은 봄날 햇살처럼 해맑았다.
올해 최고령 당선자인 시나리오 당선자 정한조 씨는 소설가로 활동해온 ‘중고 신인’이다. 1996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추리문학 부문에 당선된 뒤 ‘미술관 점거사건’(2011년·고즈넉) 등 장편소설 5권을 펴냈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10여 년 몽골을 오가다 몽골이 배경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번 당선작을 쓰기 시작했다. 정 씨는 “과거 당선된 경험이 있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고 삶이 바뀌지 않는 걸 안다. 신춘문예 당선작이 대표작이자 유작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시조 부문 당선자 고은산 씨 역시 시조에선 신인이지만 앞서 1999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에 당선돼 시집을 3권 낸 시인이다. 4, 5년 전부터 시조만이 지닌 운율의 아름다움에 빠져 자유시가 아닌 시조를 쓰기 시작했다. 충남 당진시 석문중학교 국어 교사인 그는 문학의 싹을 보이는 아이들이 백일장에 나가도록 지도하기도 한다. 고 씨는 “누군가 읽어서 위안을 주는 시조를 남기는 게 목표”라고 했다.
동화 부문 이정민 씨가 뒤늦게 글을 쓰게 된 건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 문신 씨(50)가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된 뒤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읽는 것을 보고 ‘나도 저 자리에 서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이 씨는 “유방암을 진단받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일을 겪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결심이 섰다. 동화를 쓰기 시작해 5년 만에 결실을 맺은 걸 보고 남편이 참 기뻐한다”고 했다.
희곡 부문 당선자 소윤정 씨는 대학 때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출산한 뒤 아이를 키우며 예술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홀로 있던 시간에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소 씨는 “혼자 글을 쓸 땐 더없이 기쁘고 즐겁다. 뒤늦은 등단이지만 누군가가 나를 알아봤다는 생각에 기분이 꽤 좋다”고 했다.
문학평론 당선자 황녹록 씨는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학원 강사로 20여 년을 살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석사 과정에 진학하며 뒤늦게 글쓰기에 발을 들였다. “재능이 있다”는 권유를 받고 평론을 썼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황 씨는 “문학은 전쟁터다. 이 전장에서 작가가 나타내려 했던 것을 더 넘치게 읽어주는 평론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30대 당선자들도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일어섰다. 시 부문 당선자 한백양 씨는 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문예창작학과 입시 강사로 일하며 10여 년간 시를 써왔다. 입시에 실패한 아이들에겐 “끝을 볼 때까지 써야 한다”고 격려했지만, 등단하지 못한 자신이 ‘재능이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떠나지 않았다. 한 씨는 “내겐 정말 재능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실패를 남기지 않고 싶어 끝까지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올해 최연소 당선자인 영화평론 부문 민경민 씨는 7년 연속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응모했다. 2018년 심사평에만 언급되고 낙선했지만, 올해는 드디어 당선이라는 영광에 닿았다. 그동안 온라인 사이트에 영화 리뷰를 써 왔는데 이제 ‘평론가’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내걸 수 있게 됐다. 민 씨는 “7전 8기의 마음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포기하지 않고 응모했다. 리뷰를 넘어서 평론이란 무게감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이에 비해 중편소설 부문 당선자 이상민 씨는 처음 쓴 소설을 신춘문예에 처음 응모해 당선됐다. 잡지사에서 기자, 편집자로 15년을 일하며 문장을 단련해 왔지만, 소설은 읽기만 했을 뿐 써본 적이 없다고 한다. 뒤늦은 등단이 활동에 장애가 되진 않을까. 짓궂은 질문에 이 씨는 당당하게 답했다.
“오히려 다른 일을 해봐서 문학 말곤 미련이 없어요. 당장이라도 청탁이 온다면 글쓰기에 삶을 ‘올인’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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