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운]외교 대가 키신저가 남긴 한반도 정세의 교훈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2일 23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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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문화부 차장
김상운 문화부 차장
중소 출판사인 김앤김북스가 지난해 8월 번역 출간한 ‘헨리 키신저의 외교’(원제 Diplomacy)는 어렵게 세상에 나왔다. 외교의 대가 키신저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이 책은 약 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내용도 난해해 1994년 발간 이후 30년 가까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다. 그러다 현직 외교관인 김성훈 씨가 3년간 공을 들인 끝에 최근에야 번역서가 나올 수 있었다. 최근 키신저 별세를 계기로 이 책은 3쇄를 찍으며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70년대 미중 수교의 주역으로 여러 차례 한국 대통령과 만난 저자가 쓴 책답게 미중 갈등이 격화된 가운데 최근 북한의 무력도발로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 정세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남북 관계에 큰 파장을 몰고온 미중 화해는 1960년대 사회주의 대국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국경 분쟁으로 번지면서 가능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이다. 중국 입장에서 소련의 안보 위협이 미국보다 커져 미국이 ‘쐐기전략(wedge strategy·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이간책)’을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2년 2월 방중한 닉슨은 저우언라이에게 “소련이 미국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다”고 강조했다.

닉슨은 또 “미중 양국이 각자의 동맹국(남·북한)을 억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중 양국이 각각 한미동맹과 조중동맹을 통해 남북한의 ‘군사 모험주의’를 억제하자는 얘기였다.

실제로 당시 중국은 미국과 합의한 ‘한반도 현상 유지’를 위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했다. 예컨대 북한은 미중 화해 국면을 맞아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켰지만, 중국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대미 위협 인식을 둘러싼 북-중의 견해차는 양국 사이에 긴장을 초래해 북한은 외교적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예를 들어 허담 북한 외상은 1973년 2월 방중해 미국과의 접촉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고 저우언라이에게 요청했지만, 그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부정적이던 미국 역시 허담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반대로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미 위협 인식을 고리로 한 북한의 대중(對中) 외교정책은 힘을 받게 됐다. 2018년 김정은과 트럼프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처럼 북-미 양자 대화는 중국의 고립감 혹은 조바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중 데탕트 국면과는 반대로 중국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할 유인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북한은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방침에도 불구하고 2006년 이후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벌였지만, 안정적인 북-중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점증하는 미중 갈등의 근원에는 냉전 시절 소련에 대한 인식처럼 미국이 중국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 품고 있는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키신저의 시각에서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중소 갈등 같은 돌발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미중 갈등이 쉽사리 해소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바꿔 말하면 미중 데탕트로 억제됐던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미중 갈등과 더불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북한의 최근 해상 무력도발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헨리 키신저의 외교#남북 관계#한반도 정세#군사 모험주의#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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