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선수 인터뷰 촬영 중 들은 반문이다. 공을 몇 개 놓고 바닥에 앉을 것을 요청했다가 뜨끔했다. 내가 봐도 너무 식상한 앵글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인터뷰 모델들이 촬영 현장에서 자신의 요구를 말하는 경우가 확연히 많아졌다. 이는 성별과 세대를 가리지 않는데 특히 10대들의 요구는 가끔 당혹스럽기도 하다.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절대 안 웃는다. ‘레트로’ 문화가 인기여서일까? 한 고교생은 웃는 얼굴을 부탁하는 내게 “근엄하고 진지하게 해주세요. 죄송하지만 안 웃을게요”라며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오히려 중년 이상은 환한 표정을 선호한다.
인터뷰이가 ‘극강 내향’이라 머뭇거리는 게 보이면 따로 여쭤 본다. “왼쪽 뺨과 오른쪽 중 어디가 좋으세요?” 또는 “귀엽게 나오고 싶으세요, 아니면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등.
예전엔 촬영을 사진기자에게 완전히 맡기는 분위기였다. 나름의 묘한 권력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사진가는 최고 권력자에게도 이것저것 지시할 수 있다’는 농담도 있었다. ‘셔터버튼 권력’ 때문이다. 사진에 대한 의사결정권. 영화에선 총을 든 자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대고 주변인들을 장악한다. 인터뷰 촬영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곤 했다. 하지만 이 권력은 매체와 독자, 모델이 사진가에게 잠시 위임한 것에 불과하다.
직장, 학교 등은 물론이고 가족 안에서도 이른바 ‘서열 관계’가 많이 깨지고 있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전문가들은 엄격함보다는 ‘삼촌 같은 아빠, 이모 같은 엄마’를 주문한다. 인터뷰 사진 촬영 현장에서도 수직 관계는 없어졌다. 사진가 입장에서도 수평 관계가 더 좋다. 사진가와 모델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 모델이 ‘자기표현’을 많이 해야 좋다. 대화를 즐겁게 하다 보면 예상 못 한 신박한 아이디어도 쏟아진다. 좋은 인물사진가라면 촬영 기법 못지않게 모델이 입을 자유롭게 열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능력도 필요하다. 모델의 가장 좋은 모습은 본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사진은 자신을 표현하기에 최적의 도구다. ‘기계적 회화 장치’로 순식간에 누구나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일상의 순간을 정지 상태로 기록해 준다는 점에서 거울과 다르다.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자신의 얼굴과 몸짓을 보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느끼며 자아를 인식한다. 이제 자신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타자에게도 ‘나’를 설명하며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주문한다.
스마트폰 이후 촬영과 유통이 더 쉽고 자유로워졌다. 개인 한 명 한 명이 모두 1인 미디어 운영자다. 개인 미디어의 주인공은 ‘나’다. 소셜미디어는 개인을 재현하는 매체가 됐다. 회화 시장도 그렇다. 예술교육자 임지영 작가는 최근의 미술 사조를 ‘규정을 거부하는 폭발적인 자유와 생명력’이라고 설명한다(저서 ‘그림과 글이 만나는 예술수업’). ‘개인의 자유가 극대화되고 표현과 소통의 방식도 가장 직접적인 시대’라는 것이다.
회화에서 일반 개인이 모델로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15세기경 르네상스 시대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미학자 츠베탄 토도로프는 공저 ‘개인의 탄생: 서양예술의 이해’에서 회화로 ‘개인의 재현’이 이뤄진 최초를 1세기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테렌티우스 네오 부부’ 벽화(사진)라고 본다. 이전에는 신화 캐릭터, 왕이나 장군 등 위인들만 미술의 주인공이었다. 학자는 19세기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입을 빌려 “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로마의 1세기를 설명한다. 권위와 수직 관계가 많이 사라진 인간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 벽화도 일반 서민의 개성을 매우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최근 사진으로 폭발 중인 개인들의 자유로운 표현력은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TV 생중계 시상식에서 기발한 포즈를 잡는다. 뺨에 손을 대고 ‘삐약삐약’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춤으로 관중을 웃게 만들기도 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시상대 맞은편 포토라인에 선 사진기자들이 “메달을 깨물어 주세요”라며 일일이 요청해야 했다. 개인들이 저마다 사진과 영상으로 자신들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대가 반갑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