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대외적으로 ‘동족·통일’ 개념을 지우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한 김정은이 내부적으로는 ‘지방 발전 20×10 정책’으로 인민생활을 개선하겠다고 공언했다. 구체적으로 “매해 20개 군에 앞으로 10여 년간 현대적인 지방공업공장을 건설해 10년 안에 전국의 모든 시군과 전국 인민들의 물질문화 생활수준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이를 ‘20승10 정책’이라고 읽는데, 노동신문은 “80년을 가까이 하는 우리 당의 역사, 75년을 경과한 공화국의 장성 발전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거대한 변혁, 거창한 혁명”이라고 치켜세웠다.
김정은은 23일부터 이틀간 평북 묘향산에서 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간부들을 강하게 질타하면서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담당자들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김정은의 발언을 보면 현실 인식이 너무 황당해 회의장 간부들이 ‘자다가 잠꼬대를 하는 것 아닐까’라고 속으로 의심했을 것 같다. 보도를 접한 주민들도 기가 막혀 당황하지 않을까 싶다. 김정은은 “반드시 하겠다”고 결의했지만, 그게 실현 불가능한 목표라는 것은 김정은만 빼고 모두가 안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면서 “목을 내놓으라”고 하니 무서워서 말을 못 할 뿐이다.
김정은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하려면 책 하나도 모자랄 판이지만, 그의 연설을 듣고 북한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를 가장 원초적 반박이라도 대신 해주고 싶다.
김정은은 말했다.
“지방 인민들에게 기초식품과 식료품, 소비품을 비롯해 초보적인 생활필수품조차 원만히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당과 정부에 있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다.”
북한 사람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그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고는 있을까. 된장, 간장, 칫솔, 치약 등을 공급하지 못한 것이 아무리 짧게 잡아도 30년이 훌쩍 넘었는데, 긴 세월을 모르는 척하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문제라니. 자다가 깬 것인가? 그나마 드디어 이밥에 고깃국, 기와집 타령을 하지 않으니 다행스러운 건가?”
공장 200개를 짓는다고 주민 생활이 얼마나 좋아질지는 알 수 없다. 정작 주민들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은 워낙 반세기 넘게 시달려서 이럴 때마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공장 건설 인력은 군인들을 동원한다 해도, 건설비는 누가 대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생산설비, 자재, 원료는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돈도 안 주고 책임을 묻겠다면 또 우리 주머니를 악착같이 털겠다는 말이구나.”
공장을 지어도 문제다. 이미 있던 공장들도 전기, 생산설비, 원료, 경쟁력 등 각종 문제 때문에 망가진 지 오래인데, 새로 또 짓는다고 이런 문제가 해결될 리도 만무하다. 그들의 궁금증 몇 개는 이미 김정은이 대답을 주었다. 건설자재, 설비, 원료 기지를 해당 지방 당 간부들이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국책사업으로 해결해야 할 전기, 철도 문제까지 간부들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니, 그들도 기막힐 것이다.
“차라리 정찰위성, 미사일에 빠져 있을 때가 그립겠군. 어차피 앞으로도 돈이 생기면 무기 만드는 데 탕진할 거면서, 자기가 못 한 일을 최강의 대북 제재 와중에 우리보고 해결하라니.”
실제로 김정은이 직접 나서서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다가 망친 사례는 부지기수다. 폐허로 방치된 원산갈마관광지구, 껍데기만 완공된 평양종합병원, 파리만 날리는 마식령스키장, 준공식을 성대히 열고도 5년째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 순천인비료공장….
돈을 다 틀어쥐고도 실패만 거듭한 지도자가 권한 없는 부하들에겐 실패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니 간부들도 눈앞이 캄캄할 것이다. “전기와 사료가 없다”고 말했다가 조건타발을 한다며 처형된 자라공장 지배인 신세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몇몇 공장이 돌아가도 생산 지속 가능성과 품질은 또 다른 문제다. 그때 가서 모든 생필품을 중국산에 의존해왔던 주민에게 조악한 품질의 북한산을 쓰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할지도 궁금하다.
시장경제만 도입해도 간단히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누구나 아는데, 김정은은 앞으로도 사회주의 채찍을 10년 더 휘두르겠다고 선언했다. 간부나 백성이나 머릿속에 공통으로 떠오를 말은 이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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