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법무장관 시절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는 (나에게) 반박하지 않고 라디오로 달려가 저 없을 때 뒤풀이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사건건 충돌하던 민주당 의원들을 꼬집은 말이다. 기자는 라디오 책임자나 앵커가 무반응했던 것이 의아했다. 국가가 소수에게만 허락한 전파를 이용해 정치인들이 주장을 마음껏 펴는데, 반론성 앵커 질문이 제대로 없다는 뜻 아닌가.
언제부턴가 공영방송 라디오가 흔들리고 있다. 황당한 사례가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기소된 안민석 의원이다. 그는 최순실을 향해 수조 원대 재산은닉 의혹 및 사드 배치 과정에 미국 록히드마틴으로부터 막대한 커미션을 수수했단 주장을 폈다. 대부분 2016년 말 라디오에서 기정사실처럼 한 말이다. 그때 최순실은 공적(公敵) 1호였다. 그렇다고 공영방송에서 근거 제시도 없이 비판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마주 앉아 있던 라디오 앵커들이 공적 책무를 방기한 듯했다. 대학교수가 진행한 YTN, 괴담 제조기라는 유튜버가 진행한 TBS 등을 돌아다니며 안 의원은 반복해 말했다. YTN 진행자가 “최순실의 독일 재산이 어느 정도냐”고 부추겼을 때 “독일 검찰과 독일 언론이 수조 원대로 추산한다”는 답이 나왔다. 안 의원은 앵커의 맞장구에 “독일 검찰의 돈세탁 자료도 얼추 봤다”는 말까지 했다. 자사 아나운서였던 MBC 라디오의 앵커는 록히드마틴 뒷돈 주장을 또 꺼냈음에도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다”며 마무리했다. “시간 부족으로 다시 모셔 확인하겠다”는 흔한 말도 없었다.
그 시절 앵커들은 △사실 검증 △사실과 의견의 구분이라는 저널리즘의 기본기를 잊은 듯했다. 안 의원을 향해 “왜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야 하느냐”거나, “자신 있게 말하시는데, 어떻게 알게 됐느냐”고 물었어야 했다. 그럴 때라야 청취자들은 신뢰할지 말지를 판단할 것이고, 앵커와 프로그램의 신뢰도는 올라간다. 망가진 정치 담론을 위해서도 그렇다. 앵커의 반론성 질문이 살아 있을 때 정치인들은 긴장한다. 허튼소리를 했다간 공개 망신할 수 있다. 궤변 같은 주장이 어디 한 곳에서는 걸러져야 한다.
형사 기소된 수년 전 사례를 들어서 그렇지 크고 작은 일방적 주장은 요즘도 여전하다. 보수 패널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수많은 혐의를 두고 유죄를 전제로 발언해도 듣고만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앵커들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저널리즘 ABC를 몰라서는 아닐 것이다. 여야를 불러 일방적 주장을 듣기만 하고, 판단은 뉴스 소비자에게 맡기면 된다고 믿는 걸까. 한쪽에 유리한 방송을 한 라디오 앵커가 유튜브에 고정 출연해 그쪽에 치우친 발언을 내놓는 건 뭔가. 그런 앵커의 태연함에도, 그걸 두고 보는 방송사의 무신경함에도 놀랄 따름이다.
MBC, KBS 등 공영방송 라디오 패널이 7 대 3 정도로 기울어진 지 오래다. 기울어진 패널에는 앵커 의견도 크게 작용한다. 불균형을 지적해도 오불관언이다. 당파성 강한 앵커가 기본 책무를 포기하다시피 해 저널리즘 품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지적하는 이 글은 신경이 쓰이기나 할까.
안민석 의원은 재산 은닉과 사드 뒷돈으로 최순실 가족과 민사소송도 진행 중이다. 1심에서 “1억 원 물어주라”는 판결이 났다가, 2심에선 “공익 목적이라 문제 안 된다”고 뒤집혔다. 딸 정유라가 “공익 목적이면 이래도 되냐”고 분기탱천했다. 정유라 모녀를 오래 비판해 왔지만, 이 말만큼은 동의한다. 안 의원의 근거 없는 의혹 제기는 공익에 도움이 됐던 걸까. 아니면 앵커와 합작으로 공론장 라디오의 품격을 떨어뜨린 걸까. 대법원 판단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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