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격차’를 기다리며[기고/전윤종]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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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종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장
전윤종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장
세계 경제 질서가 지각변동을 겪고 있다. 제조업 경쟁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자동차 수출에서 491만 대를 기록한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지난해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반면 기계, 화학 산업을 앞세워 유럽을 이끌던 독일 경제는 나 홀로 역성장(―0.3%)하며 침체의 늪에 빠지는 모습이다. 글로벌 산업 강국들의 위상 변화는 무엇보다 기술 경쟁력의 역전에서 비롯된다. 이는 독일, 중국과 유사한 제조업 강국인 우리에게 부단한 연구개발을 통한 초격차 기술의 확보와 기술 경쟁력 우위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글로벌 기술 경쟁이 격화되면서 정부 연구개발(R&D)의 비효율 제거와 성과 제고에 관심이 높아졌다. 대내외 환경 변화에 맞추어 정부는 ‘산업·에너지 R&D 혁신방안’을 마련했다. 먼저 쉬운 과제는 버리고 고난도·고위험 기술에 집중한다. 실패를 용인하는 도전적 연구를 확산하며, 글로벌 경쟁 우위를 위해 초실감형 디스플레이 등 게임 체인저 기술 확보에 나선다. 둘째, 분절형 요소 기술보다 통합형 대형 과제를 추진한다. 이차전지 양극재 등 과거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외 밸류체인을 망라하는 목표 지향형 통합 과제를 강화한다.

2022년, 우리나라 연구개발비는 총 112조 원이다. 민간 재원은 약 86조 원이고, 정부는 나머지 26조여 원(23.4%)을 투입했다. 일반적으로 정부는 ‘기초 연구’, 민간은 ‘제품 개발’로 역할을 나누지만, 현실에서는 중첩된 영역이 넓게 분포한다. 특히 산업기술에서는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과 협업이 더욱 긴요하다.

금번 혁신 방안은 민간 투자를 견인하는 마중물로서 산업기술 R&D에 대한 고민이 잘 드러난다. R&D 프로세스 전반을 기업·연구자 등 민간이 주도하도록 한다. 민간이 R&D를 직접 기획하는 품목지정형 과제를 원칙으로 하고, 일부 시범 과제는 운영 전권을 민간에 부여하며, 기업의 현금 부담은 대폭 완화한다. 아울러, 신진 연구자들에게 문호 확대와 연구 몰입 환경을 조성하며, 글로벌 공동연구 활성화에도 나선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등장인물 5명의 단순한 연극이나, 이야기가 난해하다. 모두가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가 누구인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이 연극은 어렵지만, 역설적으로 다양하고 창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특징 때문에 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작가는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초격차 기술 확보에 나선 산업기술 R&D도 쉬운 길을 가기보다 어려운 과제에 창의적으로 도전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마련한 금번 대책이 정부 R&D의 비효율과 저성과를 떨쳐내는 변곡점이 되길 바란다. 반도체, 자동차 등 주요 산업에서 초격차 기술 개발에 성공하고, 우리 기업이 절대 우위의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여 산업기술 R&D가 국가 전략 자산이 되어줄 것을 기대한다.

#초격차#제조업#수출#기술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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