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모순적인 존재다. ‘지금 여기’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싶은 욕망과 ‘바로 여기’를 떠나고 싶은 욕망이 함께 존재한다. 이건 현대인만의 특징은 아니다. 이를테면 유럽의 18세기는 각종 여행기가 탄생하는 여행가들의 세기였고 조선의 문인들은 금강산 유람을 위시 리스트로 꼽았다. 전자의 목적은 호기심과 새로운 것의 탐구였고, 후자의 목적은 자유로움과 자연에의 몰입이었다. 여행의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다.
그런데 이유가 꼭 필요할까. 아무 이유 없이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문득 ‘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질 때는 이병률의 시집을 추천한다. 오늘의 시에서 말하는 약속 역시 같이 떠나자는 여행의 약속이다. 참 어려운 약속이어서 잊지 말자고 그림자로 남겨 놓았지만, 지금 당신은 그것을 잊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일부러 책상에서 일어나 잊혀진 그림자를 어루만지게 되는 그런 시다. 나는 하지도 않았고 기억나지도 않았던 약속이 저절로 생겨나는 그런 시다. 다시 의자에 주저앉으면서도 잊고 싶지 않은 그런 시다. 봄이 오는 까닭에 강이 풀리고 있다. 저 굳은 약속을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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