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 명이 훌쩍 넘는 유권자들이 참여하는 인도네시아 대선 표본 개표 결과 프라보워 수비안토 후보자의 당선이 거의 확정적이다. 선관위 공식 발표는 한 달 뒤에나 이뤄지지만, 압승이 예상된다.
프라보워는 엘리트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32년간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독재자, 수하르토 대통령의 사위였다. 역사적 과오에서 자유롭지 않은 프라보워의 압승, 무슬림 표심을 공략한 아니스 바스웨단의 선전, 메가와티가 이끄는 투쟁민주당이 배출한 간자르 프라노워의 부진으로 요약되는 이번 대선 결과는 이념과 명분보다는 실리와 재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표심을 반영한다.
타 정당 후보와 연대가 가능한 역동적인 인도네시아 정치 구조 속에서 조코위 대통령은 무리하게 규정을 바꿔 가며 장남 기브란을 지난 대선의 경쟁자였던 프라보워의 러닝메이트로 앉히며 냉혹한 ‘적자생존’의 법칙을 확인시켜 주었다. 조코위는 ‘왕조 세습 정치’라는 오명과 함께 선심성 예산 배정에 행정력까지 동원한 은밀한 압력 행사로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대선 직전 특별 예산을 투입해 ‘반소스(Bansos)’로 불리는 쌀과 생필품을 배포한 농촌 마을과 저소득층이 밀집한 투표소에서 프라보워를 찍은 몰표가 나오는 사례를 목격할 수 있었다.
서구 언론은 ‘조코위 3.0 시대 개막’에만 초점을 맞추지만 프라보워의 정치적 역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프라보워 당선의 일등 공신은 조코위 대통령이고, 특히 조코위 대통령의 장남을 부통령으로 지명해 조코위 지지자들의 표를 흡수하면서 프라보워는 승기를 굳힐 수 있었다. 하지만 대선 3수에 성공한 프라보워의 뚝심과 현실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능력은 반대파도 인정하는 바다. 자바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프라보워는 해외 경험이 풍부하고 영어·독일어·프랑스어·네덜란드어에 능통한 엘리트로 카자흐스탄, 요르단 등에서 사업을 성공시킨 기업인이기도 하다.
선거 기간 중에는 언행을 조심하며 조코위의 눈치를 본 프라보워가 막상 대통령이 되면 조코위 세력을 밀어내고 자신만의 정치를 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아무리 조코위 대통령이 뒤에서 조율한다 해도 37세 정치 신인 부통령이 산전수전 다 겪은 70대 중반 프라보워에게 반기를 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실제로 선거 직후 지지자들과 만나는 첫 공개 방송에서 장시간 당당하게 자신의 비전을 밝히는 프라보워 옆에서 기브란은 병풍처럼 조용히 자리만 지켰다. “몇 개월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저를 부통령으로 선택해 준 프라보워에게 감사한다”며 바싹 몸을 낮춘 기브란의 처신은 조코위 왕조의 시작보다는 ‘프라보워 왕조의 부활’로 읽혔다. 조코위 대통령의 역점 사업이자 프라보워 가문 회사가 참여하는 신행정수도 프로젝트는 탄력을 받겠지만, 개발 이익과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두 세력 간 경쟁이 가열되면 결국 파열음을 낼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도 많다.
기업인들과 외국인투자가들이 조코위 대통령의 후광을 입은 프라보워 후보의 당선을 반기는 분위기 속에 대선 직후 주가도 소폭 상승세다. 프라보워는 니켈, 농산물 등의 수출을 제한하는 등 국내 자원을 무기화해 온 전임 대통령의 정책 기조는 유지하되 수출 제한 품목을 확대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국제 정세에 밝은 사업가 출신 프라보워는 전임 대통령보다 더 치밀하고 노련하게 인도네시아의 국익과 자국 기업의 실리를 챙길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이미 국방부 장관 시절 한국과의 KF-21 전투기 공동 개발 계약 이행 과정에서 애매한 태도로 대금 지급을 미루며 애를 먹인 장본인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못지않게 파격적인 행보가 예상되는 프라보워의 동향을 주시해야 고차방정식이 되어가는 경제·외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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