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니아 슐리의 책 ‘글쓰는 여자의 공간’에 소개된 미국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말이다.
평생 소아과 의사로 일하며 시를 썼던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는 “한쪽이 나를 지치게 할 때 다른 쪽이 나를 쉬게 한다”고 말했다. 진료실에서 셜록 홈스를 창조한 코넌 도일이나 소설 ‘성채’의 A J 크로닌도 그러했을 것이다. 나 역시 처방을 쓰거나 극본을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의사로 진료하며 만난 많은 분들로 인해 내 이야기의 세계도 성장해 왔기에, 작가로서의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한의사로서의 나일 것이다.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쓴다’는 행위를 통해 연결된다는 것이 나는 때로 경이롭다. 쓰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여는 작업이며 한 인간에 대한 탐구의 과정이다. 처방을 쓰기 위해 나는 진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먹는지, 잘 자는지, 남모를 고난으로 아픈 것은 아닌지, 이 증상은 왜 하필 지금 나타났을 것인지를 고민한다. 한 사람의 체질과 개별적 상황이란 모든 변수에 최적의 처방을 ‘쓰기’ 위해 고심하는 것이다. 극본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라서 이런 행동을 하며, 다른 인물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한약 처방을 써내는 것과 극의 한 장면을 쓰는 것은 무척이나 많이 닮아 있다. 체질과 약재의 특성을 조화롭게 구성한 처방을 써내고, 한약재 하나하나가 서로 시너지를 이룰 수 있도록 정성껏 달여 내야 제대로 약효를 볼 수 있듯, 극본도 인물과 사건들이 촘촘히 엮이도록 해야만 보시는 분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홀로 어두운 책상 위에서 고독히 긴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좋은 처방을 쓰고 진료실을 나설 때, “그래 이거야!” 하는 신을 쓰고 즐겁게 책상을 떠날 때,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다가오는 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글쓰기를 처방해 드리고 싶다. 다정한 봄이 잔인해지는 날이 있거든, 일기를 써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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