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처음 유심히 본 건 1996년 여름, 천안 독립기념관에서였다. 당시 나는 전국을 한 바퀴 돌며 한국의 주요 역사 및 문화유적지를 방문하는 대학교 문화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독립기념관도 그중 한 곳이었다. 도착해서 보니 진입로 양옆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내 눈에 태극기는 흥미로운 기하학적 패턴을 갖고 있는데, 그런 디자인이 일렬로 무한 반복되니 그 독특한 멋이 배가되는 것 같았다.
거기서 기념품으로 태극기를 하나 샀다. 영국에 돌아가 대학교 기숙사 벽에 걸기 위해 태극기를 가방에서 꺼냈는데 곧 난관에 직면했다. ‘어디가 위일까?’ 당시만 해도 인터넷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웠던 때라 학교 도서관에서 국기 백과사전을 찾아봐야 했다. 답은 3개의 실선으로 이루어진 건이라는 괘가 왼쪽 상단에 있어야 한다는 것. 초기 버전의 태극기 디자인은 4개의 괘가 다양한 순서로 배열되었다는 것도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일단 방으로 돌아와 태극기를 똑바로 걸었지만 각각의 요소들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내 눈에는 그 괘들이 일종의 모스 부호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태극기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등장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시청 앞에서 태극전사를 응원했을 때 태극기는 내 볼 한쪽에 크게 그려져 있었다. 자전거 라이딩을 갈 때마다 구리 한강시민공원에서는 펄럭이는 거대한 태극기를 마주할 수 있었고, 국가대표팀 축구 경기 시작 전 애국가를 부를 때는 붉은 악마가 휘두르는 태극기를 볼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국기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태극기 휘날리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중에 태극기가 1883년에 국기로 지정되어 14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조금 놀랐다. 중국 외에 다른 나라와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던 은자의 왕국 조선에서는 국가를 식별할 국기의 필요성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가 보다. 다소 늦게 국기가 만들어졌지만 가로와 세로줄, 기하학적 문양을 가지고 있는 태극기에는 다른 국기와 차별되는 독특한 매력이 스며 있다. 어쩌면 굴곡을 거친 한국의 역사처럼, 그 복잡함과 미묘함을 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태극기 전시를 했을 때 나는 아주 특별한 태극기를 만났다. 김붕준 선생 부인이신 노영재 애국지사가 손수 만든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95-1호)의 복제품이 그것이다. 한국에서 하루라도 지내본 사람이라면 일제강점기의 참혹한 역사를 모를 수 없다.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이 합당한 제도를 갖춘 자주독립 국가로 서게 하기 위해 이 태극기를 쥐고 온갖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임시 청사 위를 펄럭이는 태극기를 상상해 본다. 나는 그것이 드러내 놓고 일본을 경멸한 도발이자 저항의 상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또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에게 잡힌 영국 포로들의 노력을 떠올리게 한다. 포로수용소의 상황은 극도로 가혹했고, 소위 ‘죽음의 철도’를 놓기 위한 강제노동과 고민이 거셌지만, 영국군 포로들은 사기를 잃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영국 유니언 잭 깃발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경례했다고 한다. 국기는 침대의 흰색 천, 모기장의 파란색 천, 인도네시아 군인 모자의 안감에서 떼어낸 빨간색 천을 이용해 손수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유니언 잭을 가슴에 품은 영국 전쟁 포로들이 생환 의지를 계속 다질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의 태극기 휘날리기도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계속 불타오르게 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과 영국의 역사는 대부분 매우 다르기 때문에 가끔 두 국가의 역사에서 공통된 경험을 찾을 때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어떤 동지애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즘엔 태극기를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도 몇천 원에 불과하지만, 애국지사들의 손바느질로 탄생한 임시정부 태극기에 담긴 자주독립의 노력과 그 의미를 잊지 말았으면 한다. 3·1절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의 꿈과 이상을 우리가 얼마나 구현하고 있는지 되새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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