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공급망 재편 읽고 발 빠르게 움직인 日국회
‘반도체 벨트’ 선거공학뿐인 韓이대로 되겠나
지난달 24일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열린 대만 TSMC 공장 개소식 연단 한가운데에는 모리스 창 TSMC 창업주가 서 있었다. 그 왼쪽에선 집권 자민당 국회의원인 아마리 아키라(甘利明)와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가 나란히 자리해 함께 테이프를 끊었다.
의미 있는 공장 기공식이나 준공식에 국회의원이 오는 건 한국에서도 흔한 일이다. 보통은 지역구 국회의원이 등장해 사진 잘 찍히는 데에 선다. 삼성전자 평택·화성캠퍼스 기공식 때인 2015년, 2018년에 각각 해당 지역구 여야 국회의원이 연단에 섰다.
반도체 공장 행사에 등장하는 한국 국회의원이 의미 있는 정책을 추진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화성 기공식에 참석했던 야당(당시 여당) 의원이 이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돼 삼성전자를 찾아 중소기업 지원 협력을 당부했다는 기사는 나온다. 평택 기공식에 왔던 여당 의원은 지금 국회 첨단전략산업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 특위는 발족 뒤 10개월간 4차례 회의했고 그나마 두 번은 위원장, 간사 선임을 위한 회의였다.
하기우다는 도쿄, 아마리는 가나가와현이 지역구다. TSMC 공장이 있는 구마모토까지 1200km 넘게 떨어진 ‘남의 동네’다. 일본도 한국처럼 당선되려면 중앙 정치보다 밑바닥 지역구 활동이 중요하다. “왜 우리 동네에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지 않았나”라고 비판받을 여지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대체 이들은 왜 연단에 올랐을까.
아사히신문이 지난달 27일 보도한 ‘TSMC 유치의 진상(眞相)’ 기사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2021년 4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당시 일본 총리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가진 미일 정상회담 뒤 발표한 공동성명에는 52년 만에 처음으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이 거론됐다. 당시에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일 동맹의 강화 정도로 해석했다.
일본 정부의 노림수는 조금 달랐다. 단순한 군사적 견제를 넘어 중국이 대두하는 반도체에서 미일이 협력하자는 포인트를 잡았다. 자민당이 곧바로 움직였다. 당 산업 정책통인 아키라는 “(단순한) 산업 육성이 아니라 국가 전략으로 맡겠다”며 반도체 전략추진 의원연맹을 꾸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도 발족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경제산업상(장관)이던 하기우다는 국회에서 “세계적 조류를 읽지 못해 적절한 정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인 뒤 반도체 전략 마련을 지시했다. 늘 하던 대로 일하던 경산성 관료들에게 “고교 학예회 준비하는 게 아니다”라며 강하게 몰아붙였다.
일본 정부가 미일 정상회담 후 2개월 만에 마련한 ‘반도체 디지털 산업 전략’과 TSMC 유치는 이렇게 이뤄졌다. 우리가 알던 ‘판단 느린 아날로그식’ 일본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첫 삽을 뜨고 365일 24시간 돌관(突貫)공사로 지은 곳이 지난주 공식 개소한 TSMC 구마모토 공장이다. 그럴듯한 사진 한 장 찍고 홍보용 의정보고서 만들기 위해 객식구로 참석한 게 아니다. 급변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외 기업을 유치해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중심으로 다시 서겠다는 독한 집념을 드러낸 무대였다.
한국은 어떠한가. 얄팍한 정치공학적 계산으로 경기 남부를 ‘반도체 벨트’로 이름 붙인 선거 전략만 있다. 승자만이 살아남는 ‘반도체 전쟁’에서 어떻게 대응하겠다는 국가 전략은 여야 총선 전략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는 2030표를 노린다거나 대기업 임원 출신을 허겁지겁 영입해 전략공천하는 건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서 한국의 살길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것과 전혀 다른 엉뚱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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