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헌법에 ‘낙태할 자유’를 명시했다. 올 11월 대선을 앞두고 낙태권이 주요 쟁점 중 하나로 떠오른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로 논쟁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 상·하원은 4일(현지 시간) 합동회의를 열어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명시한 헌법 개정안을 찬성 780표, 반대 72표로 가결시켰다.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10배 이상 압도적으로 많았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낙태권 보장은 영국이나 독일 등 주변 국가는 물론 2022년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폐기한 미국에도 새로운 불씨가 될 전망이다. 아녜스 칼라마르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헌법에 낙태할 자유를 명시한 것은 여성 권리의 최고봉”이라며 “다른 국가에서도 낙태할 수 있는 길을 더욱 강력하게 보호할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미 연방대법원은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에서 개인의 자유를 명시한 헌법 14조에 따라 낙태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2022년 보수 성향 대법관이 우위를 점하며 이를 폐기한 뒤 찬반 논란이 거세다. 유럽에선 많은 국가들이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 등을 근거로 낙태를 전면 또는 조건부 허용하는 추세다. 한국은 2019년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입법 공백’ 상태다.
“내 몸은 나의 선택” 佛 낙태권 보장… 교황청 “생명 앗을 권리 없어”
‘낙태 자유’ 헌법 첫 명시, 논쟁 재점화 佛 극우 르펜도 찬성… 압도적 가결 “낙태권 확대 여권 신장 운동 활기” 伊 등은 ‘불가피한 경우’로 제한… 美대선서 ‘낙태권’ 이슈 첨예해질듯
프랑스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낙태할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했다. “내 몸은 나의 선택”이란 여성의 신체 자치권(body autonomy)이 영구적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다. 4일(현지 시간) 헌법 개정을 위한 프랑스 상·하원 투표 결과 찬성표가 반대표의 10배 이상 압도적으로 많았다. 여성이지만 극우인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의원도 찬성표를 던졌다.
세계 곳곳의 낙태권 찬반 논란은 다시 불붙을 조짐이다. 교황청은 프랑스 의회의 표결 직전에 “생명을 앗아갈 권리는 없다”며 공개적으로 반대 성명을 냈다. 유럽 역시 대다수가 낙태를 합법화하고 있지만, 제한을 두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에선 보수, 진보 진영이 낙태권 후퇴 움직임을 놓고 공방을 벌이며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 “佛, 당파적 분열 넘어 낙태권 가결”
프랑스 상·하원이 이날 가결시킨 헌법 개정안 제34조에는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으로 정한다’는 조항이 새로 추가됐다. 사실 프랑스는 1975년부터 낙태가 합법화돼 현재 임신 14주까지 여성의 선택으로 가능하다. 이번 개헌으로 당장 가시적 변화가 있진 않겠지만 낙태권을 헌법에 명문화한 상징성은 무척 크다.
가브리엘 아탈 총리는 표결에 앞서 “우리는 ‘당신의 몸이 당신에게 속해 있고 당신 대신에 통제할 권리가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메시지를 모든 여성에게 보내고 있다”며 의원들에게 찬성표를 던질 것을 촉구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가결 직후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프랑스의 자부심,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적었다. 프랑스 최초로 양원 합동회의를 주재한 야엘 브론피베 하원의장도 X에 “이제 프랑스에서 낙태는 영원히 권리가 될 것”이라고 자평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X에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프랑스의 결정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프랑스의 낙태권 헌법 명문화는 미국의 낙태권 후퇴 흐름과 무관치 않다. 2022년 6월 미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허용한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을 폐기하자, 이런 분위기가 유럽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며 헌법 개정을 추진해 왔다.
● 교황, 표결 직전 “생명 빼앗을 권리 없어”
전 세계에서 낙태권 찬반 논란이 다시 재점화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날 개헌 투표에 앞서 파리 시내와 베르사유궁 인근에선 개헌 찬반 시위가 각각 열리기도 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교황청도 개헌 표결 직전 성명을 통해 “보편적 인권의 시대에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며 “모든 정부와 모든 종교 전통이 생명 보호가 절대적인 우선순위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호소한다”고 밝혔다. 프랑스 주교회는 성명에서 “가톨릭 교인으로서 우리는 임신부터 죽음까지 생명에 봉사해야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이를 지키기로 선택한 이들을 지지해야 한다”며 낙태 금지를 위한 단식과 기도를 촉구했다.
유럽 국가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낙태를 폭넓게 허용하지만 가톨릭교도가 많은 국가들에서는 ‘불가피한 경우’로만 제한하는 곳이 많다.
영국은 낙태에 가장 허용적인 국가로 꼽힌다. 의사 2명의 승인을 받으면 임신 24주까지 낙태가 가능하고, 임신부 생명이 위험할 때 등엔 그 이후라도 허용된다. 하지만 낙태를 선택한 여성은 기소될 위험이 있어 낙태권 보장이 여전히 정치적 쟁점이다. 프랑스24는 “영국에선 최근 18개월간 여성 6명이 낙태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고 전했다. 노동당은 기소 중지를 위한 관련법 개정안을 제출할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는 1978년부터 임신 12주까지 임신부 건강이나 생명이 위험할 때 낙태가 허용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부 의료인들이 협조적이지 않아 여성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원정 낙태’를 하고 있다.
보수 우위의 미 연방대법원은 2022년 6월 임신 약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다. 올 11월 대선을 앞둔 조 바이든 대통령은 낙태권에 찬성하며 이를 쟁점화하고 있다. 공화당 유력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낙태권 폐기 판결을 지지하면서도 여성 표심을 겨냥해 절충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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