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정신의학과 교수, 피해자 인터뷰… 상처 치유 과정 속 ‘정의’ 의미 고찰
잘못 바로잡고 싶어하는 피해자들… 원하는 것은 보복 아닌 반성과 변화
◇진실과 회복/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김정아 옮김/312쪽·1만9000원·북하우스
#1 세라는 집안에 침입한 남자친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 가해자의 부모는 아들의 ‘훌륭한 인성’을 증언해 달라는 편지쓰기 캠페인과 변호사 선임비 후원 캠페인을 시작했다. 몇 주 뒤 세라는 이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임을 언론에 공개했다. #2 로지는 동생이 아빠에게 심하게 얻어맞기 시작하자 아빠를 경찰에 신고했다. 집에 온 경찰은 ‘앞으로 아빠한테 잘해 드려라’라고 했다. ‘잘해 드린다고 안 때리는 게 아니라고요’라고 말하자 ‘네 태도가 그러니까 집이 이 꼴이지’라는 말이 돌아왔다.
책의 부제는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한 정의’이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트라우마는 지진이나 테러 같은 재난의 결과가 아니다. 미국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교수인 저자는 복합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CPTSD)라는 용어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CPTSD란 단일 사건이 아니라 가정폭력, 성폭력, 아동학대 같은 반복적인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스트레스 장애를 뜻한다. 이 책의 내용도 정신의학을 넘어 사회학적, 철학적 담론을 넓게 아우른다. 폭력 피해자 여성 26명과 남성 4명을 인터뷰한 내용이 바탕을 이룬다.
폭력 피해자들이 오히려 ‘꽃뱀이네’ ‘당할 만했네’라는 등의 비난을 감수하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일이다. 저자의 핵심 논지는 ‘트라우마 장애가 힘을 빼앗긴 이들의 질병이라면,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회복의 원리’라는 데 있다.
피해자들은 당연히 정의의 실현을 원한다. 이들이 원하는 정의는 무엇일까. 자신이 당한 만큼의 고통을 가해자에게 돌려주는 것일까. 저자는 ‘무엇보다 피해자 본인의 회복이 최우선이다’라고 말한다. 가해자의 처벌이 피해자의 회복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더 많은 피해자들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분노와 보복적 분노를 구분하며 가해자의 고통보다 ‘반성과 변화’를 요구했다. 금전도 위로가 될 수는 있지만 많은 피해자들은 ‘죄를 인정하는 상징적인 정도’의 배상을 원했다.
남자친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던 세라의 노력으로 미국 미니애폴리스 공원에는 성폭행 생존자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결과 세라는 치유받을 수 있었다. 상습적 가정폭력을 경험했던 로지는 부모의 진솔한 사과와 반성을 얻어냈고 화해할 수 있었다.
저자는 폭력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딛고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공동체가 피해 사실과 그 심각성을 함께 ‘인정’하고, 가해자가 진정한 ‘사죄’를 하며, 가해자가 공동체의 분노를 받아들여 ‘책임지는’ 자세를 확실히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절차를 통해 피해자는 공동체로부터 인정과 보상을 받고 치유를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생존자가 돌아가야 할 공동체는 가해자와 공모를 끊고 생존자의 분노와 고통을 존중하며 그의 명예를 회복하는 공동체다.” 여러 폭력 피해자들이 이후 지게 될 짐이 두려워 선뜻 행동에 나서기 주저하는 우리 사회, 우리 공동체에도 꼭 필요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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