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전남 담양군 고서면 시골 주택 안에 있는 대나무과학연구소. 박충년 전남대 신소재공학부 명예교수(70)가 대나무를 손에 든 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80㎡ 남짓한 연구소 내부에는 직접 제작한 다양한 가공 기계가 설치돼 있었다. 또 주변에는 1만6500㎡ 넓이의 대나무밭이 있어 연구 재료를 언제든 가져다 쓸 수 있었다.
대나무의 고장인 담양 출신인 박 교수는 평생 수소에너지, 이차전지를 연구한 재료공학자다. 서울대를 졸업한 뒤 KAIST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36년 동안 전남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0년 전남대에서 퇴임한 뒤 대나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수소 및 신에너지학회 회장을 지냈고 한국대나무발전협회 회장을 맡은 경력이 있다. 수소에너지 등 최첨단 산업 재료 분야의 석학이 대나무 전문가가 된 이유는 뭘까.
박 교수는 2003년 친척이 만들던 대나무 돗자리에 대한 가공 기술 자문에 응하면서 고분자 재료로서의 대나무 매력을 알게 됐다. 그는 세계적으로 대나무는 1500종이 있고 볏과 식물에 속하지만 목질(木質) 성격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대나무는 목질이지만 나이테가 없어 실제 나이를 모른다고 했다.
박 교수는 “대나무의 수명은 평균 10년인데 2개월이면 다 자랄 정도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식물”이라며 “대나무 건축자재는 나무에 비해 열전도율이 3배가량 높아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고 했다.
담양이 죽향(竹香)으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설명했다. 큰 대나무는 왕죽, 맹종죽, 분죽 등 세 종류가 있는데 담양은 왕죽의 북방한계선이라고 한다. 담양의 기후가 품질 좋은 왕죽이 자라기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2004년 둥글고 마디가 있는 대나무를 합판처럼 쭉 펴는 기술을 개발했다. 원통 대나무를 평평하게 만들어 건축자재, 도마, 탁자, 공예품 재료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 대나무로 만든 각종 생활용품은 본래 무늬가 살아있고 강도나 방수 기능이 뛰어나다. 주부 박모 씨(52)는 “대나무 도마는 단단하고 금방 말라 사용하기 편리하다”고 말했다.
대나무로 만든 수학놀이 학습도구인 피타고라스판 등 10여 개 체험 키트도 눈길을 끌었다. 피타고라스판은 대나무로 만든 삼각형 조각으로 수학 공식인 피타고라스 정리를 입증하는 도구다. 학습도구로 제조한 대나무 체험 키트는 노인들의 치매 예방 용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박 교수는 원통 대나무를 건조할 때 쪼개지는 것을 막는 기술, 대나무에 구멍을 뚫지 않고 술을 채우는 기술 등도 개발했다. 애주가 이모 씨(60)는 “3년 묵은 대통주는 30년산 양주 같은 맛을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20년 동안 대나무 연구에 매진해 열과 힘을 이용한 관련 가공 기술 10여 개의 특허를 땄다. 각종 플라스틱 제품을 친환경 대나무 제품으로 대체할 기술을 개발했지만 상용화는 이루지 못했다. 대나무 가공 연구에는 재미를 느끼지만 상용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박 교수는 “최근 중국에서도 어설프게 대나무를 펴는 기술을 개발해 관련 제품을 만들고 있다”며 “대나무 국내 산업 발전을 위해 개발한 가공 기술이 상용화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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