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약 2년 동안 세계 곡물 가격이 30% 이상 떨어지면서 안정세를 되찾았지만 국내 가공식품 가격지수는 오히려 10% 넘게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식품 원재료 가격의 하락세가 국내 물가에 제때 반영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8일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달 세계식량가격지수는 117.3으로 집계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과 글로벌 공급망 불안으로 식량 가격이 크게 치솟았던 2022년 3월(160.3)보다 26.8% 떨어진 것이다. 지수를 구성하는 5개 품목군 중 유지류와 곡물의 가격지수는 23개월 동안 각각 52.0%, 33.1% 내렸다.
하지만 같은 기간 국내 가공식품 가격은 10.3%가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원료가 되는 국제 유지류 가격이 급락했음에도 식용유 가격은 21.0%가 올랐고 곡물 가격 하락에도 수프(20.4%), 밀가루(17.8%), 빵(12.5%) 등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이 기간 전체 소비자물가가 7.2% 오를 때 가공식품은 이보다 1.5배 가까이 오르면서 먹거리 물가 부담을 키운 것이다.
이런 가운데 국내 식품업계에서는 상당수의 기업이 지난해 사상 최고의 영업이익을 거두며 논란이 됐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공식품은 원재료나 에너지 가격에 따라 제품 가격이 오르지만 원재료 가격이 떨어졌을 때는 제품 가격이 내리지 않는 대표적인 품목”이라며 “이 때문에 물가 상승기에 가계와 서비스 업계에 부담을 준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18일 서울 서초구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주재한 민생경제점검회의에서 “장바구니 물가를 내릴 수 있도록 농산물을 중심으로 특단의 조치를 즉각 실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릴땐 빨리, 내릴땐 버티기” 식품업계 ‘그리드플레이션’ 도마에
[먹거리 물가 비상] 가공식품 가격상승률, 물가의 1.5배 재료값 상승땐 반년마다 가격 인상… 한번 올린 값은 안내리며 최대 실적 정부 “가격담합 모니터링” 인하압박… 업계 “인건비 등 부담 인하 어려워”
18일 서울 영등포구 이마트 여의도점의 식품 코너. 한 70대 남성 고객이 올리브유 여러 종류를 들었다 놨다 하며 가격을 비교하더니 카트에 2병을 담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돌아와 한 병을 내려놓곤 “모든 물가가 다 오른 것 같다”며 혀를 찼다. 인근에 사는 김윤자 씨(70·여)는 “최근 식용유 등의 물가가 다 올라 여기저기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며 식료품을 사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여성 고객은 부침가루를 손에 든 채로 점원을 부르더니 더 작은 포장의 제품으로 바꾸기도 했다.
최근 2년여간 가공식품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국민들의 물가 부담을 키우고 있다. 특히 식료품의 원료인 국제 곡물 가격이 하향 안정세를 보이는데도 이런 추세가 제품 가격에 반영되지 않아 식품업계의 과도한 이윤 추구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원재료 값이 급등할 때는 기업들이 이를 빠르게 제품 가격에 반영하면서 내릴 때는 가격 조정을 하지 않고 버티기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탐욕 인플레이션)’ 문제를 연일 거론하면서 기업들에 가격 인하를 압박하고 있지만 식품업계는 난색을 보이고 있다.
● 재료값 상승은 빨리 반영, 하락 땐 버티기
18일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달 세계곡물가격지수는 113.8로 2022년 3월(170.1)보다 33.1% 하락했다. 2022년 정점을 찍었던 세계곡물가격지수는 지난해부터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곡물 등의 원재료로 만들어지는 국내 가공식품 가격은 2년 전보다 큰 폭의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부침가루 가격은 2022년 3월보다 18.6% 올랐고, 밀가루(17.8%) 국수(15.1%) 케이크(13.8%) 등도 10% 넘는 오름 폭을 보였다. 가공식품 가격 상승률은 10.3%로 같은 기간 전체 물가 상승률(7.2%)의 1.5배에 달한다.
기업들은 마치 ‘살라미 전술’처럼 여러 차례 나눠 가격 인상을 꾸준히 단행했다. 최근 한국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2018∼2021년 국내 기업의 평균 상품 가격 유지 기간은 약 9.1개월이었지만 2022∼2023년에는 6.4개월로 줄었다. 2022년부터는 반년에 한 번꼴로 가격을 올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앞다퉈 제품 가격을 올린 국내 식품 업체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고 있다. 지난해 오리온과 농심은 각각 4924억 원, 2121억 원(연결 기준)의 영업이익을 내며 사상 최대치를 다시 썼다. 삼양식품과 빙그레, 풀무원 등도 역대 최대 규모의 영업이익을 보였다.
● 식품업계 “전기, 인건비 부담 여전”
농림축산식품부는 최근 잇달아 식품기업들과의 간담회를 열고 가공식품 등에 대한 가격 담합 발생 가능성을 상시 모니터링하겠다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제보 등을 통해 구체적인 혐의를 포착하면 조사에도 착수할 방침이다. 정부 관계자는 “밀가루와 식용유처럼 원재료 가격과 직결되는 제품을 중심으로 업계에 가격 인하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식품업체들은 현실적으로 가격 인하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한 업체 관계자는 “원재료 가격이 떨어지긴 했지만 전기요금과 인건비 등 부담은 여전하다”고 했다. 또 다른 식품업계 관계자는 “원자재 가격이 떨어져도 통상 6개월은 지나야 실제 생산 비용에 반영된다”며 “전쟁으로 인해 물류가 불안정해지며 이 기간이 연장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가격 인하는 어렵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