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는 말을 기치로 사랑 한 줌 없는 삶을 견뎠다. 불우했던 이팔청춘에 청부 살인을 시작해 40여 년간 감정을 거세한 채 살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 그의 메마른 삶에 타인과 생명을 향한 사랑이 움트려 한다면 그건 축복일까, 더 큰 불운일까.
15일부터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초연 중인 창작 뮤지컬 ‘파과’는 2013년 발표된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제목 ‘파과’는 부서진 과일 또는 여자 나이 16세를 뜻한다. 작품은 파과(破瓜)일 적부터 파과(破果)로서 살아야 했던 조각, 그리고 어린 시절 조각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후 20년간 복수심과 동경심을 원동력 삼아 살아온 ‘투우’가 그리는 이야기다.
투우 역을 맡은 배우 신성록은 증오와 동경, 연민이 뒤엉켜 비틀린 투우의 내면을 비릿한 웃음과 느릿한 말투 등으로 매끄럽게 표현한다. 조각 역의 구원영은 세월이 흐르며 곪아버린 마음과 그 속에서도 돋아나려는 새살로 인한 미묘한 감정을 건조하면서도 처연한 연기로 그려낸다. 조각 역은 차지연과 구원영이, 투우 역은 신성록과 김재욱, 노윤이 번갈아 가며 연기한다.
소설과 비교해 뮤지컬에선 누아르 장르의 매력을 더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스카프를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등 주연 배우들이 무대에서 몸소 선보이는 격정적 액션 장면은 긴박감을 더한다. 통상 뮤지컬에서 액션을 가미한 연기 및 군무가 극 전개와 다소 괴리되는 인상을 주는 것과 달리 ‘파과’ 속 액션은 극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누아르 영화를 연상케 하는 무대세트와 흑백 영상도 작품의 매력을 더한다. 차갑고 대칭적인 형태의 철제 난간과 계단은 날카롭고 무거운 분위기를 형성했다. 총 3개 층으로 이뤄진 수직적 무대는 언제 어디서든 감시와 위협을 당할 수 있는 조각의 불안한 삶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성근 전개와 심리묘사는 다소 아쉽다. 조각이 어릴 적 친척 손에 거둬지며 겪었던 성장통, 투우가 살해범에게 온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배경 등이 뮤지컬에선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지극히 인간적인’ 이들의 양가적 마음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조각이 과거 자신을 거둬주고 청부 살인 방법을 전수한 스승에게 느꼈던 애틋함과 현재 부상당한 자신을 치료해주는 ‘강 박사’로 향한 연정이 어수선하게 병렬되며 흐름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다만 등장인물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내레이션과 20여 곡의 서정적 넘버가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를 보완했다. 5월 26일까지, 6만∼1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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