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못 할 봄기운[이준식의 한시 한 수]〈257〉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28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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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이끼 위에 나막신 자국이 찍힐까 봐서인가.
가만가만 사립문을 두드려 보지만 오래도록 열리지 않는다.
뜰 가득한 봄기운이야 막을 수 있을쏜가.
발간 살구꽃 가지 하나가 담장을 넘어섰다.
(應憐屐齒印蒼苔, 小扣柴扉久不開. 春色滿園關不住, 一枝紅杏出墻來.)

―‘화원 구경을 놓치다(유원불치·遊園不値)’ 엽소옹(葉紹翁·1194∼1269)







봄의 화원이 궁금했던 시인이 친구네인지 이웃집인지 조심스레 사립문을 두드려 본다. 한데 주인은 도무지 대문을 열어줄 기색이 없다. 부재중인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방문을 꺼리는 것인가. 애당초 빗장을 걸어둔 게 한창 푸릇푸릇한 이끼밭을 아끼자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불청객을 반길 리 없다. 괜스레 외인이 풀밭을 휘젓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발자국을 남길까 저어해서 그랬을 터다. 주인의 이 갸륵한 정성을 누가 탓하랴. 화원 구경에 실패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시인의 눈길을 끈 한 장면, 살구꽃 가지 하나가 벌써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제아무리 빗장을 단단히 질러둔들 그게 다 무슨 소용. 바깥세상이 궁금하기는 발갛게 달아오른 살구꽃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투정하듯 시인이 주절주절 내뱉는 한마디. ‘뜰 가득한 봄기운이야 막을 수 있을쏜가.’ 봄의 정취, 봄의 기운을 억지로 가두려 하지 말고 봄의 향연을 함께 누리자는 권유가 완곡하면서 간절하다.

시 말미에 쓰인 ‘홍행출장(紅杏出墻·붉은 살구꽃이 담장을 벗어나다)’이란 말은 ‘봄기운이 한창 무르익다’는 비유로 쓰는 성어인데 바로 이 시에서 유래했다. 시인의 당초 의도와 달리 요즘은 이 성어가 부정(不貞)한 유부녀의 행실을 빗대는 용어로 더 많이 쓰인다.

#봄#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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