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천문학 박사이며 현직 연구원이다. 작가 소개를 인용하자면 “우주 공간을 지켜보는 일”을 하고 있어 그의 소설은 관점이나 스케일이 남다르다. 무엇보다도 소설집 ‘위그드라실의 여신들’은 낭만적이다. 작품집의 주제의식은 분명하다. 인간의 조그만 지식으로 광대한 우주를 이해할 수도, 지배할 수도 없으며 상생과 공존만이 살길이라는 것이다.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명제를 작가는 스릴러 혹은 모험 이야기의 형식으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첫 작품 ‘위대한 침묵’은 제목에서 암시하는 대로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지적 생명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주는 광대하므로 인류 외에도 문명을 가진 지적 생명체가 있을 텐데, 어째서 그들은 침묵하는가?
그러나 사실 작가가 정말로 하려는 이야기는 과학지식과 기술을 약탈과 독점에 악용하는 거대 기업과 그 아래 깔린 인간의 오만이다. ‘인텍’은 에너지 위기에 처한 인류에게 거의 독점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다국적 기업이다. 주인공 미후는 이 ‘인텍’ 홍보부에서 별 볼 일 없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갑자기 부사장에게 불려간다. 회사 내부에 스파이가 있으니 증거를 잡아 오라는 것이다. 작가는 중편 분량 안에 거의 장편에 가까운 풍부한 설정과 해박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음모와 갈등, 충격적 반전, 우주적 규모의 폭발이 숨막히게 얽힌 거대한 세계를 구축하여 독자를 사로잡는다.
표제작 ‘위그드라실의 여신들’은 인류의 위기를 다룬다는 면에서 앞의 작품과 공통점을 갖지만 주인공들의 태도나 관점은 정반대이다. 우주 기지에서 목성의 거대 위성인 유로파의 생태계를 연구하는 세 여성 연구자는 지구가 운석을 타고 떨어진 우주 바이러스로 인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소식을 전해준 지구의 프로젝트 매니저는 유로파의 생태계를 파괴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외계 생물을 산 채로 채집해서 지구를 구할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로파 기지의 연구자들은 애꿎은 남의 행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도움을 구할 길을 발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연구자들은 스스로 삶을 바쳐서라도 지구와 유로파 모두를 살리는 쪽을 택한다.
문학 사조로서 낭만주의(Romanticism)는 대략 18세기 말에 독일에서 시작돼 19세기 초중반 유럽을 휩쓸었다. 낭만주의 사조의 가장 큰 특성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낭만주의 작품에서는 주인공들이 이성과 합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거나 사랑이나 공포 등의 강한 감정에 휩쓸린다. 혹은 현실의 이해득실을 넘어선 신념이나 이상을 위해 기꺼이 자기 삶을 불사르기도 한다.
작가는 천문학자이므로 그에게 인간의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는 당연히 우주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인류의 생존이라는 이상을 위해 행동한다. 그리고 인류‘만’의 생존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작가의 주인공은 우주 안에서 우주 전체와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한다. 문학도로서 순수한 ‘낭만’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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