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정부가 본사 해외 이전 의사를 내비친 자국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ASML을 붙잡기 위해 ‘베토벤 작전’이란 이름까지 내걸고 총력전에 나섰다. 조부가 네덜란드 출신인 베토벤이 주 활동 무대였던 독일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ASML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만든다. 이 회사 장비 없인 어떤 반도체 기업도 회로선폭 5nm(나노미터) 이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다.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주 총 25억 유로, 한화 약 3조6000억 원을 긴급 투입해 ASML 본사가 있는 남부 에인트호번 지역의 전력·주택·인력 등 인프라를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작년 11월 총선에서 1당이 된 극우 자유당이 외국인노동자의 세제 혜택을 없애는 법안을 통과시킨 뒤 ASML 최고경영자가 “회사가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밝히자 화들짝 놀라 내놓은 반응이다. 본사 임직원의 40%가 외국인인데, 해외 고급 인재 유치가 더는 어렵게 됐다는 게 이 회사의 불만이다.
요즘 세계 각국은 반도체 산업 유치에 발 벗고 나섰다. 2027년까지 70조 원 이상을 투자하는 미국을 비롯해 각국은 수십조 원 단위 보조금을 내걸었다. ASML처럼 탁월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본사를 옮긴다면 파격적 지원을 제시하며 환영할 나라들이 줄을 서 있다.
뺏고, 뺏기는 반도체 산업 국가 총력전이 격화하는 가운데 메모리반도체 글로벌 1, 2위 기업을 보유한 한국의 상황 인식은 지나치게 안이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기업 지원은 세액 감면과 규제 완화에 그칠 뿐, 경쟁국에 맞서기 위한 보조금 지원은 최근에야 정부 여당이 가능성을 내비친 정도다. 이렇게 우리 기업들을 ‘잡아 놓은 물고기’로 취급한다면 국내의 첨단 산업 기반과 양질의 일자리를 지켜 내긴 대단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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