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에티켓 제1 철칙… ‘가식-허세로 불쾌감 주지 말라’[설혜심의 매너·에티켓의 역사]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1일 23시 30분


서양 예법서 시원 ‘성격의 유형들’
그리스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
아부-오만-자기중심적 등 ‘꼴사나운 30가지 인간형’ 분류
악당 지지하며 권력 점유하는 자… 심각한 사회악 초래 경고도

아테네 대학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테오프라스토스(왼쪽에서 두 번째)와 아리스토텔레스(왼쪽) 등이 그려져 
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이자 그의 학파를 계승한 뛰어난 철학자였다. 그의 저작인 ‘성격의 유형들’은 30가지 
꼴사나운 인간형을 설명한 책으로 서양 예법서의 시원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아테네 대학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테오프라스토스(왼쪽에서 두 번째)와 아리스토텔레스(왼쪽) 등이 그려져 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이자 그의 학파를 계승한 뛰어난 철학자였다. 그의 저작인 ‘성격의 유형들’은 30가지 꼴사나운 인간형을 설명한 책으로 서양 예법서의 시원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이미 물건을 다 팔았는데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며 데려오기를 좋아한다.” 그리스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기원전 371∼기원전 287년)가 묘사한 ‘눈치 없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 연재의 첫 꼭지를 테오프라스토스로 시작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가 남긴 ‘성격의 유형들’이 서양 역사에서 예법서의 시원을 이룬다고 판단해서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이자 그의 학파를 계승한 뛰어난 철학자였다.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언장에 만약 그가 원한다면 자신의 첫째 부인이 낳은 딸과 결혼하기를 바란다고 적어놓았다. 하지만 이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며 그가 남긴 수많은 저작 가운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성격의 유형들’은 오늘날 전해지는 그리스 작품 가운데 파손 상태가 가장 심각한 것이다. 이 까다로운 텍스트를 한국어 번역본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고전학자인 김재홍 덕이다.

‘성격의 유형들’은 아테네 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사람들의 꼴사나운 행동거지를 유형별로 분류한 것이다. 그 행동들은 딱히 범죄라고 규정할 수는 없으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품위가 없는 것들이다. 가식을 부리는 사람, 아부하는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 지나치게 열성적인 사람,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 감사할 줄 모르고 투덜대는 사람, 오만한 사람, 나이가 들어 뒤늦게 배우는 사람 등 총 30가지 인간형을 그려내고 있다.

‘작은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연회에서 기를 쓰고 주인공 옆에 앉으려는 사람이다. 아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사소한 일도 굳이 델포이 신전까지 데려가서 하는가 하면 기르던 애완견이 죽으면 그럴듯한 족보를 새긴 석판이며 장례 기념물을 세운다. 그런 사람이 작은 행사에서 간단하게 보고하는 일이라도 맡으면 면류관을 쓰고 흰 외투를 걸치고 나와 ‘아테네 시민들이여’라며 단순한 몇 마디를 하고는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양 감격에 빠지곤 한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작은 명예에 대한 사랑을 ‘자유인답지 않은 비열한 욕구’라고 정의한다. 그리스 시대에 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자유인이었음을 상기하자면, 이는 노예적이고도 비굴한 행위를 의미한다. 그런 행동은 내면과 행동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는 허세에 가까운 것이고, 허세는 곧 비굴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후 매너의 역사를 관통해 허세는 몹시 경계해야 할 악덕의 지표로 꼽히게 된다.

‘촌놈’, ‘속없이 친한 체하는 사람’, ‘눈치 없는 사람’은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들인데,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촌놈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기 전에 트림을 유발하는 음식을 잔뜩 먹고는 마늘 냄새가 향수만큼 달콤하다고 주장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속없이 친한 체하는 사람은 분쟁이 발생했을 때 공평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의 지지자뿐 아니라 적대자까지 기쁘게 하려고 한다. 눈치 없는 사람은 한마디로 ‘가장 곤란한 시간을 절묘하게 골라 고통스럽게 귀찮게 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소소하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이라면 심각한 사회악을 초래하는 유형도 있다. ‘악당의 친구’가 바로 그런 이들이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누군가가 악당과 친교를 맺는 이유는 결국 그 자신이 악에 대한 욕구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이들은 민회나 재판정 같은 공적 장소에서 이렇게 행동한다.

―민회에서 자신을 인민의 경비견이라고 말하고 ‘만일 우리가 이 사람(악당)을 내친다면 우리를 대신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노고를 아끼지 않을 그 누구도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악당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부르고,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한 것이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어떤 것은 악당이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실상 악당은 머리가 좋고 신뢰할 수 있고 영리하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 학자들은 남성성이 여러 형태를 띠고 있으며 상황별로 취사선택을 한다는 ‘복수의 남성성’ 이론을 제안했다. 악당의 친구는 ‘공모적 남성성’을 가진 사람들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지닌 악당의 곁에서 그를 지지하며 권력감을 전유하는 인간형이다. 이 둘은 위계적 공모관계를 맺고 있기에 악당의 친구는 악당을 실제로 존경하거나 존경하는 척하며 온갖 악행을 돕는다.

1824년 간행된 책에 담긴 인간 유형별 삽화. 사진 출처 아마존닷컴
1824년 간행된 책에 담긴 인간 유형별 삽화. 사진 출처 아마존닷컴
‘성격의 유형들’은 원래 좋은 캐릭터와 나쁜 캐릭터 두 버전으로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쁜 행동거지를 묘사한 작품만이 살아남았다. 이후 나타나는 서양 예법서도 좋은 행동에 대한 권장보다 꼴사나운 행동을 금지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매너에 관한 최소한의 이상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 우리 일상에서도 미덕에 감동하는 순간보다 꼴사나운 일에 불쾌감을 느끼는 일이 훨씬 더 많지 않은가.

#서양 에티켓#성격의 유형들#꼴사나운 30가지 인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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