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월 29일자에 4개 면으로 구성된 특별 섹션을 발행했다. 그 섹션을 통상 인쇄되는 신문 섹션들을 바깥에서 감싸도록 했다. 이렇게 탄생한 1면이건만 가장 중요한 머리기사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로 취재 출장을 갔다가 간첩 혐의로 체포된 자사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32)의 구금 1년째 되는 날이었다. 백지(白紙) 편집은 러시아에 대한 항의였고, 용기 있는 저널리즘에 대한 다짐이었다.
▷기자 생활 8년째인 게르시코비치의 부모는 옛 소련의 경제난을 피해 1970년대 미국에 정착했다. 그런 그가 냉전 종식 후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첫 미국인 기자가 된 점이 기막히다. 그는 프랑스 통신사 AFP를 거쳐 4년 전 WSJ에 합류했다. 간첩 행위로 몰린 지난해 봄 출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된 용병기업 와그너 그룹 취재를 위해서였다. 푸틴의 요리사였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의문의 항공기 사고로 숨진 프리고진이 설립한 그 회사다.
▷특별 섹션 1면은 3분의 2가 백지였는데, 위쪽에 제목은 달려 있었다. “빼앗긴 1년: 그의 취재기사가 여기 실렸어야 했다.” 그런 뒤 4개 면에 걸쳐 그가 1년 동안 놓쳐야 했던 친구 결혼식과 축구 경기 시청을 비롯한 일상의 소중함 등을 기사로 담았다. 그는 지난달 모스크바 콘서트장 테러를 자행한 범인들과 같은 구치소에서 독방에 감금돼 있다. 외부 접촉 없이 비공개 재판 절차를 밟는 동안 러시아가 공개한 짤막한 법정 동영상으로 그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러시아는 강력한 언론 통제 국가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뉴스매체가 외국과 인적-경제적 인연을 맺었다면 모든 기사 첫머리에 “외국 기관(Foreign Agent)이 관여했다”는 딱지를 붙여야 할 정도다. 정부 매체의 발표만 믿으라는 뜻이다. 푸틴의 정적 나발니의 의문사처럼 ‘권력의 반대편’이란 말은 독살 납치 구금의 위험을 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구촌 삶의 방식을 바꾼 러-우크라니아 전쟁과 그 이면을 알려야 한다는 믿음은 꺾이지 않고 있다. WSJ와 취재 기자는 이런 위험 감수를 언론의 길이라 믿었다.
▷언론 탄압은 러시아 외에도 중국 이란 미얀마 등 권위주의적 독재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다. 국경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가택연금 혹은 투옥된 언론인이 520명이 넘는다고 한다. 중국에만 100명 넘는 기자가 체포 또는 구금됐고, 팔레스타인 전쟁을 시작한 이스라엘에서도 기자 35명이 억류 중이라는 것이다. 저널리즘엔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WSJ 특별섹션 1면의 커다란 빈칸은 강렬한 메시지다. 신문은 독립적으로 취재한 진실을 담을 것이고, 외부의 힘이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할지라도 누군가가 그 일을 지속할 것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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