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제철소, 숲으로 재탄생… 도시가 다시 푸른 숨을 쉰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3일 03시 00분


[창간 104주년]
‘그린스완’ 시대, 숲이 경쟁력이다 〈2〉 獨 뒤스부르크 ‘도시숲’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스부르크시의 란트샤프트 공원. 29년 전 가동을 멈춘 제철소 부지가 ‘도시숲’으로 재탄생해 주민들이 여유롭게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났다. 란트샤프트 공원 홈페이지 캡처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스부르크시의 란트샤프트 공원. 29년 전 가동을 멈춘 제철소 부지가 ‘도시숲’으로 재탄생해 주민들이 여유롭게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났다. 란트샤프트 공원 홈페이지 캡처
“제철소 용광로를 구석구석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신기하네요.”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스부르크시의 란트샤프트 공원. 중앙에 우뚝 선 7m 높이 용광로 꼭대기에서 만난 주민 클라우스 페테르존 씨는 40여 년 전인 어렸을 때부터 제철소를 보고 자랐다며 이같이 말했다. 당시 제철소는 안전 조명만 드리워진 어두컴컴한 ‘접근금지 구역’이었다. 보안 직원들이 막고 있는 데다 너무 위험해 근처에 다가갈 상상도 못 했던 이곳이 가동을 멈춘 뒤 이제 전망대로 변했다. 이날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축구장 약 250개 크기(180ha·헥타르)의 터엔 용광로, 파이프 등 녹슨 제철소 시설과 푸른 녹음이 한데 어우러진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울타리 없이 개방된 공간에 방문객들이 유모차를 끌고 카메라를 멘 채 모여들었다. 이들은 푸드트럭에서 음식을 사 먹거나 곳곳에 설치된 벤치에서 여유롭게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라인강 지류 엠셔강 유역에 있는 뒤스부르크 란트샤프트 공원은 1985년 가동을 멈춘 티센그룹의 마이데리히 제철소가 ‘도시숲’으로 재탄생한 공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낸 제철소를 살아있는 역사로 보존하면서 시민들에게 삭막한 도시의 쉼터를 제공했다. 거대한 흉물로 남을 뻔한 제철소에 숲이 생명을 불어넣어 준 셈이다.

숲이 된 ‘녹색 제철소’ 年100만명 발길… 줄던 인구도 다시 늘어


[‘그린스완’ 시대, 숲이 경쟁력이다] 〈2〉 獨 뒤스부르크 ‘도시숲’
제철소 폐쇄 9년만에 공원 탈바꿈
자전거 씽씽, 암벽등반… 콘서트까지
SNS ‘핫플’로 인기, 해외서도 찾아와… 정류장 신설 등 도시 인프라 확대


‘녹슬고 거대한 제철소를 어찌할 것인가.’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스부르크시의 란트샤프트 공원은 1985년 가동을 멈춘 티센그룹의 마이데리히 제철소가 있던 자리에 조성됐다. 란트샤프트 공원 홈페이지 캡처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스부르크시의 란트샤프트 공원은 1985년 가동을 멈춘 티센그룹의 마이데리히 제철소가 있던 자리에 조성됐다. 란트샤프트 공원 홈페이지 캡처
1985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스부르크시의 마이데리히 제철소가 경영 악화로 가동을 멈추자 지방 정부와 주민들은 이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정치인들은 시설을 유지하면 재정에 부담이 된다며 “철거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주민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때부터 가족의 일터였던 85년 역사의 랜드마크를 없앨 수 없다”며 반발했다.

주민들의 일자리를 책임지던 지역 경제의 중심이 사라지자 도시가 소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생겨났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던 시민들은 ‘독일 산업유산협회’를 조직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낸 제철소 보존의 필요성을 알리는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를 설득했고, 정부가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정부는 국제건축전시회(IBA)를 열어 제철소와 주변 황무지를 개발할 아이디어를 공모했다. 이때 선정된 페터 라츠 건축가의 사업안으로 제철소 본연의 모습을 보존하되 숲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란트샤프트 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곳 일대엔 옛 제철소 건물을 활용해 암벽 등반을 할 수 있는 곳 등이 조성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오른쪽 사진). 뒤스부르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란트샤프트 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곳 일대엔 옛 제철소 건물을 활용해 암벽 등반을 할 수 있는 곳 등이 조성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오른쪽 사진). 뒤스부르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1994년 도시숲으로 재탄생한 뒤스부르크시의 란트샤프트 공원을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찾았다. 옛 광석 저장고 외벽에선 시민들이 암벽 등반을 하고 있었다. 석탄 수송용 기차가 달리던 철로에선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대형 탱크는 여름철 다이빙장으로 활용된다. 수시로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행사와 전통시장도 열린다.

● 소셜미디어 시대 ‘이색 관광지’로

독일은 국토의 약 33%가 산림으로 뒤덮여 도시마다 숲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도시에서 시민들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조성되는 도시숲은 수도 베를린, 유럽 금융허브 프랑크푸르트 등에도 조성돼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쉼터로 자리 잡고 있다.

뒤스부르크시 란트샤프트 공원은 독일에서 유일하게 산업시설을 공원으로 탈바꿈시켜 주목받았다. 독일 산업화의 역사를 품은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만든 셈이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들은 “이런 이색적인 공원을 보기 힘들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학생 10여 명을 인솔해 견학을 온 사회복지사 조피 알더 씨는 “아이들에게 이 도시가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직접 보여주러 왔다”며 “도시의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돼 소중한 장소”라고 말했다.

이색적인 경관은 소셜미디어 시대를 맞아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에서 딸과 함께 방문한 메시카 씨는 “소셜미디어에서 사진을 보고 독특한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 공원은 최근 8년간 방문객이 연평균 100만 명이나 된다.

도시숲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나온 창의적 아이디어가 해외 방문객도 불러 모으고 있다. 공원의 물 관리 노하우가 대표적이다. 공장 지붕이나 건물 표면 굴곡진 부분에서 모은 빗물은 공원 곳곳에 설치된 작은 수로를 따라 나무와 꽃으로 흐르고 있었다. 공원 개장 이후 30년간 이곳에 뿌리 내린 식물은 700종을 넘는다.

이 공원 홍보 담당 레나 시엘러 씨는 “제철소 대형 탱크는 이제 저수조로 쓰이며 가뭄 때 공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며 “네덜란드 등 수자원에 관심이 많은 국가에서 찾아와 어떻게 빗물 공급 시설을 운영하는지 묻는다”고 소개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015년 이 공원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오아시스’ 10곳 중 하나로 선정한 바 있다. 개방된 도심숲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운영 노하우도 주목받고 있다.

● 낙후 지역에 인구 늘고 경제 활력

공원 개발로 뒤스부르크시는 활력을 되찾았다. 지역 방문객이 늘자 지방 정부도 도시 인프라에 투자하며 거주 여건이 개선되고 있다. 공원 옆에 있는 ‘란트샤프트 공원 북부’ 정류장은 지난해 말 확장 공사를 완료했다. 내년에는 인근에 약 600만 유로(약 87억 원)를 투입해 신규 정류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인근 낙후됐던 마르스로 지역은 공원으로 수혜를 입은 곳으로 꼽힌다. 마르스로는 1990년대 이민자들이 급격히 늘며 현재 주민 중 이민자 비율이 60%를 넘어섰다. 지역 경제가 침체돼 실업과 범죄가 늘었고, 경찰이 주시하는 지역이 됐다.

하지만 가까운 도시숲이 관광지로 발전하고 주기적으로 콘서트, 맥주 페스티벌 등 행사가 열리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일자리와 휴식을 얻었다.

제철소 폐쇄 뒤 인구가 급격히 줄었던 뒤스부르크시는 이민자 유입과 함께 란트샤프트 공원 조성 등 다양한 도심 재생 노력을 기울인 덕에 인구가 늘고 있다. 뒤스부르크시에 따르면 제철소가 가동을 멈추기 전인 1983년 54만1000명이었던 인구는 계속 내리막을 걸으며 2014년엔 48만6000명까지 줄어 최저점을 찍었다. 이후 인구가 점차 늘면서 지난해 52만5000명까지 회복됐고 올해는 5000명 더 늘 것으로 추산된다.

#숲#그린스완#숲 경쟁력#도시숲#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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