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학전’ 폐관 두달]
‘학전’ 정체성 훼손 막으려 폐관… 새 어린이극장에 이름 사용도 거절
지인들 “항암치료로 몸 많이 부어… 다들 너무 오래 그를 잊고 살았다”
《‘학전’ 폐관 두달, 위암과 싸우는 김민기
굳게 닫혔던 문을 열자 묵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울 대학로 학전 건물의 4층 사무실. 김민기(사진)가 떠난 빈자리엔 그가 피우던 담배 냄새만이 남아 있었다. 위암 4기로 경기 고양시 일산 집에서 칩거하는 그의 ‘지금’을 살펴봤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찬다. 머리카락도 부쩍 빠진다. 손발 끝은 항암치료 때문에 어느새 새까매졌다. 지인들이 경기 고양시 일산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하지만 이젠 만나기 부담스러울 정도다.
뒤늦게 대중도 그를 찾는다. 그의 옛날 노래를 다시 듣고, 과거 동영상을 일부러 찾아본다. 관심이 ‘반짝’ 높아진 것과 상관없이 그는 대중 앞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고 한다. 가수이자 극단 학전(學田)의 대표 김민기(73) 얘기다.
그가 33년을 일군 극단 학전이 3월 15일 폐관된 지 두 달 가까이 됐다. 정부는 옛 학전 공간에 새 어린이극장 개관을 추진하며 ‘학전’이란 이름을 넣고 싶어 했다. 하지만 최근 김민기는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뭐라고 이름을 남기겠나.”
● “고맙다” “미안하다”
지난 6개월간은 김민기에게 가슴 아픈 시간이었다. 위암 4기였는데 간으로 전이가 됐고, 학전의 운영 상태도 악화됐기 때문. 지난해 늦가을 서울 종로구 한 한옥 마당에서 열린 차남의 결혼식. 김민기는 지인들에게 “학전 문을 닫아야겠다”고 읊조렸다.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김민기의 한 경기고, 서울대 동창은 “민기가 평소 말랐었는데 그날 보니 많이 부어 있더라”라고 했다.
그해 11월 김민기는 학전의 폐관 결정을 대외적으로 알리게 된다. 한 달여 뒤 12월 31일 학전의 송년회 자리.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김민기가 들어오자 주위는 차분해졌다. 할 말이 많은 자리였지만, 김민기는 말을 아꼈다. “고맙다” “미안하다” 정도. 학전 출신 배우 이황의는 “치료가 힘드신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저희도 폐관에 대해 물어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학전의 폐관 소식이 알려지자 주위의 관심이 커졌다. 물론 김민기도 학전을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위탁 운영도 의논했다. 하지만 김민기는 스스로 학전이란 이름을 지우기로 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다른 곳에서 운영한다고 되겠나. 그건 아닌 거 같다.”
33년간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못자리’라고 자임했던 학전의 정체성이 외부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김민기를 잊고 있었다”
학전은 1994년 창립 이후로 30년 동안 계속 공연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명 캐릭터 공연에 밀려 김민기의 창작 어린이극은 점점 어려워졌다. 결국 폐관 결정이 나서야 김민기는 대중의 관심 속으로 다시 들어왔다. 극심한 경영 위기와 김민기의 나빠진 건강 상태에 사람들은 적지 않게 놀랐고, ‘인간 김민기’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방송사들은 다큐멘터리와 예능을 통해 김민기를 재조명했다. 중년층에게는 그와 함께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지금 젊은층에게는 잘 몰랐던 우리 대중문화계 ‘큰어른’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런 뒤늦은 깨달음은 김민기의 선후배들도 다르지 않았다. 강헌 음악평론가는 “김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뒤 학전 출신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들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민기 형이 그렇게까지 아픈 줄 몰랐다’는 말들이 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도 그럴 것이 김민기는 자신의 병세에 대해 주위에 전혀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수 한영애는 “걱정되고 염려는 되지만 일부러 전화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분이 그런 것(안부 전화)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건강해지길 기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 ‘학전’ 이을 이름 찾는 ‘대국민 공모전’
김민기가 이끌던 대학로 학전 건물은 시설 개·보수를 거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한국본부(아시테지 코리아)가 7월부터 어린이·청소년 공연장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김민기가 사재까지 털어가며 유지해온 학전 공간의 운영을 사실상 정부가 맡게 된 것이다. 정부는 학전의 리모델링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정유란 아시테지 이사는 “처음 학전을 찾았을 때 너무 낡아서 현대적으로 싹 고치자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내부 논의 결과 현재 학전의 모습 자체가 학전의 역사란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에 내부 구조 변경도 최소화하고 대대적인 도색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공연장이 문을 열면 이전 학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방지영 아시테지 이사장은 “학전에 이어 새롭게 마련되는 공연장은 어린이극을 창작하고 제작하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여러 공연을 시도하고, 그것을 어린이·청소년들과 직접 선보이는 공간이 될 것”이라며 “학전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활용해 어린이극 제작의 링크와 허브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공연장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김민기가 떠난 학전은 이제 ‘구(舊)학전’이라 불리고 있다. 새 공연장 이름을 짓기 위한 ‘대국민 극장명 공모전’은 9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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