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이어 상법 개정 추진 논란
이복현 “이사 충실의무, 주주로 확대… 합리적 경영 판단땐 면책 제도화”
재계 “주요국에 없는 규제” 반발… 상장사 절반 “개정땐 M&A 재검토”
2022년 LG에너지솔루션 분리 상장으로 점화됐던 상법 개정 논의가 정부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본격화하고 있다. 상법상 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하자는 것인데, 결국 주주 이익을 침해하는 경영 판단을 할 경우 이사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주로 야권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해왔지만 최근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도 상법 개정의 필요성에 힘을 싣는 모양새다. 재계는 상법 개정안이 통과할 경우 소송 리스크로 기업 경영이 흔들릴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 정부발(發) 상법 개정 논란 재점화
12일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증권학회가 공동 개최한 세미나에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쪼개기 상장’과 같이 전체 주주가 아닌 회사나 특정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례가 여전히 빈번하다”며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 및 주주의 이익 보호’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상법 개정 이슈는 2022년 초 LG화학과 LG에너지솔루션의 분리 상장으로 개인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보면서 처음 불거졌다. 기업 경영진과 대주주의 그릇된 경영 판단으로 소액주주가 피해를 보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고,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국회에서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까지 확대하자는 논의가 불붙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동안 이에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던 정부마저 상법 개정에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윤 대통령은 올 1월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소액주주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언급한 데 이어 지난달엔 투자자 이익 보호를 위한 방안 마련을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달 말에는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상법 개정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민주당 정준호 의원은 상법상 이사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의 비례적 이익과 회사’로 확대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새 국회에서 발의했다.
정치권에서는 정부에서 야심 차게 추진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힘을 쓰지 못하자, 상법 개정을 통해 활로 찾기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 만회용 카드로 개인투자자들의 표심 잡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 재계 “소송 천국 될 것” 반발
재계에서는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할 경우 불필요한 소송 리스크가 커질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상장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61.3%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로 넓히면 ‘주주대표소송과 배임죄 처벌 등이 확대’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인수합병(M&A) 계획과 관련해 응답 기업의 52.9%는 이사의 충실 의무가 확대되면 재검토(44.4%)하거나 철회·취소(8.5%)하겠다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주요국에서 사례를 찾기 힘든 규제라고도 주장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게 의뢰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모범회사법) 영국 독일 캐나다 일본 호주 등의 관련법에서는 ‘이사가 주주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규정은 두지 않고 있다.
최근 상법 개정안에 대해 경제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기 부담스러운 기업들은 속앓이만 하는 상황이다. M&A나 회사 분할, 배당, 매각 등 중요한 경영상 결정과 관련해 모든 주주들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총수 일가 등 지배주주와 장기 투자하는 주주, 하루에도 몇 번씩 주식을 사고파는 주주의 이해관계가 같을 수는 없다”며 “한정된 자원으로 설비투자를 할지, 배당을 늘릴지 결정하는 것이 이사들의 역할인데 어떤 선택을 해도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국 리스크를 피하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이 주주까지 확대되면 기업들의 경영 판단이 위축되고 소액주주 및 행동주의 펀드들의 소송 남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주 보호장치를 새로 마련하는 것보다는 지금 있는 제도를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많다.
이 원장은 “이사의 충실 의무 범위 확대가 형사적 이슈로 번짐으로써 경영 환경이 위축될 수 있는 한국적 특수성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사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경영 판단을 한 경우 면책받을 수 있게 제도화한다면 경영에 큰 제약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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