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섬마을 주민 돌보는 병원선
3개월마다 낙도 찾는 ‘전남511호’… 공보의-간호사 태우고 섬 77곳 순회
주민 대부분 고령자로 물리치료 인기… 상추-꼬막 등 챙겨와 고마움 전하기도
병원선 2척으로 전남 섬 167곳 다녀… 의료진-주민 입 모아 “자주 방문했으면”
《섬 주민 건강 지키는 ‘바다 위 병원’
수평선 멀리서 초록색 십자가가 선체에 새겨진 ‘전남511호’가 모습을 드러내면 섬 주민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오메, 왔네 왔어!” 동아일보 기자가 전남 77개 섬 주민 건강을 책임지는 이 병원선에 이틀 동안 탑승해 진료 현장을 취재했다.》
11일 오후 1시 20분, 전남 고흥군 남양면 우도 남쪽 200m 해상.
섬에서 보트를 타고 온 주민 8명이 조심스럽게 ‘전남511호’에 올라탔다. 이들은 배 안에 들어서 자연스럽게 접수실로 향했다. 접수실 옆에는 내과 치과 한방과 진료실과 약제실, 방사선실, 임상병리실 등이 배치돼 있었다. 53년째 우도에 살고 있다는 신일남 씨(74)는 “논일을 못 할 정도로 허리가 아파서 왔다”며 “오늘 내과, 치과 진료와 물리치료를 모두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511호는 390t 규모의 국내 최대 병원선이다. 상담부터 처방까지 원스톱으로 가능한 이른바 ‘바다 위 병원’인데 골밀도측정기, 혈액분석기, 물리치료기 등도 갖추고 있다. 건조와 의료 장비 탑재에 약 130억 원이 들었다. 이 배는 병의원과 보건소는 물론이고 약국조차 없는 외딴섬들을 돌며 주민들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한다. 동아일보 기자는 의료진과 함께 전남511호를 타고 11일 우도, 12일 고흥군 봉래면 쑥섬(애도)을 방문했다.
● 물리치료실 가장 인기
우도에는 현재 49가구 85명이 살고 있다. 0.5km²에 못 미치는 작은 섬이다 보니 선박이 정박할 시설도 없어 주민들은 병원선에서 보낸 보트를 타고 진료를 받으러 온다. 주민 신영숙 씨(62)는 “삭신이 쑤셔도 육지 병원에 가는 게 불편해 3개월마다 오는 병원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며 “올 때마다 건강을 챙겨주는 의사 간호사 선생님이 식구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진료와 물리치료를 받은 신 씨는 환하게 웃으며 양손 가득 약 봉투를 들고 섬으로 갈 보트를 기다렸다.
배에는 의학, 치의학, 한의학 전공 공중보건의가 각각 1명씩 탑승해 주민을 진료한다. 부산에서 인테리어 사업을 하다 5년 전 우도에 들어왔다는 김남석 씨(64)는 “도시에선 약국에서 쉽게 약을 구했는데, 여기선 아파도 해열제 하나 사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미국에 거주하다 여생을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내기 위해 3개월 전 섬에 들어왔다는 이재환 씨(55)도 “최근 꼬막 작업을 많이 하면서 허리 쪽이 아팠다”며 진료를 받고 어머니의 약 봉투를 함께 챙겨 갔다.
증상이 심각해지기 전 대형병원을 찾으라고 조언하는 것도 공보의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레지던트 1년차 때 그만두고 공보의로 온 김진영 씨(27)는 “최근 혈소판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낮은 간부전 환자를 발견했다”며 “위급한 상황이라 대형병원을 빨리 방문하라고 했다”고 돌이켰다. 한의과 공보의 조재현 씨(27)도 “2주 전 안면 마비 증세를 보이는 환자가 찾아왔길래 빨리 육지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설은 물리치료실이라고 한다. 섬에는 대부분 고령층이 거주하는데 “생계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다 보니 몸 곳곳이 쑤신다”며 병원선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 11일에도 진료 개시 30분 만에 물리치료실 침대 4개가 모두 찼다. 허리에 물리치료를 받은 명재만 씨(70)는 “허리가 시원하고 좋다”고 말했다. 10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혼자 농사를 짓는 송순자 씨(76)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다 어깨를 다쳐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며 “수술 후 어깨가 쑤실 때마다 병원선에 와서 물리치료를 받는데 효자가 따로 없다”고 말했다.
진료실에서 환자들은 개인적 고충을 털어놓기도 한다. 한 환자는 “얼마 전 남동생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요새 밤에도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다른 환자는 “작년에 허리 수술을 받았는데 일이 여전히 많다. 쉬고 싶은데 잘 안 된다”고 했다. 김 씨는 묵묵히 듣다 두 환자에게 “힘드셨겠다. 너무 힘들면 꼭 큰 병원에 가 보시라”고 조언했다.
● 병원선 직원들은 섬마을 수호천사
전남511호는 매달 평균 18일 동안 운항하는데 한 번 출항하면 2, 3일 동안 섬을 다니며 진료한다. 운항 기간 중 의료진은 배 안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조 씨는 “선상 생활이 많이 익숙해졌고 침대도 편해서 크게 불편하지 않다”고 했다. 매끼 식사를 같이 하다 보니 서로 ‘식구’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다. 동갑내기 공보의 3인방은 육지에 도착해서도 함께 식사와 산책을 할 정도로 친하다고 한다.
전남511호의 최고참은 2006년부터 19년째 병원선 생활을 하고 있는 간호사 이숙연 씨(51)다. 이 씨는 “오랜 기간 섬을 찾다 보니 주민들 얼굴을 거의 모두 외웠다”며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혹시 돌아가신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무료로 진료를 받는 주민들은 상추, 콩 같은 농작물을 수확하거나 낙지, 바지락, 꼬막 등 해산물이 생기면 따로 보관해 놨다가 배를 탈 때 들고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12일 병원선이 방문한 쑥섬 부녀회장은 아침 일찍 부침개를 만들어 가져왔다. 차병래 전남511호 선장은 “섬 주민들의 애환을 들으며 말동무를 해주다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며 “휴가도 제대로 못 가는 상황이지만 즐거워서 계속 병원선을 몰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결혼한 정성윤 항해사는 “신혼이지만 병원선 근무 탓에 자주 외박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다행스럽게도 아내가 좋은 일을 한다며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준다”고 했다. 쑥섬 주민 강순혜 씨(62)는 “섬에는 약국도 마트도 없다. 또 다들 나이가 있다 보니 외부에 진료를 받으러 가기 쉽지 않다”며 “병원선 의료진은 섬마을 수호천사”라고 말했다.
● “짧은 진료 시간-긴 진료 주기 아쉬워”
의료진은 많은 주민을 한 번에 진료하다 보니 진료 시간이 짧고, 돌아야 하는 섬 수에 비해 배가 적다 보니 진료 주기가 긴 점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김 씨는 “의료 기기도 배에 있는 것들만 사용하다 보니 아무래도 진료에 한계가 있다. 또 3개월마다 치료하다 보니 면밀한 추적 관찰이 쉽지 않다”고 했다. 치의학 공보의 정회윤 씨(27)도 “구강 관리가 익숙지 않은 어르신이 많은데 스케일링이나 구강검진을 제외하면 해드릴 수 있는 게 솔직히 많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주민들도 병원선이 더 자주 왔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우도 주민 김선례 씨(57)는 “병원선에서 빠르고 정확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3개월이 아니라 매달 한 번씩 방문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쑥섬 주민 박강국 씨(55)도 “수령할 수 있는 약의 종류나 양이 더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남도는 현재 병원선 2척을 운영하고 있다. 전남511호는 여수시와 강진·고흥·보성·완도군에 있는 섬 77곳을 돌고 있다. 전남512호는 목포시와 무안·신안·영광·진도·해남군에 있는 섬 90곳을 오간다. 이들 섬 167곳 중 135곳(약 81%)에는 의사가 한 명도 없다. 병원선 두 척에 탄 의료진 15명은 지난해 섬마을 주민 9173명에게 2만4851건의 진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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