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까지 그처럼 결 좋은 인간을 만나 본 적 없다.’ 2007년 동아일보에 실린 ‘내 마음속의 별’ 시리즈에서 가수 조영남은 21일 세상을 떠난 고 김민기를 자신의 스타로 꼽았다. 바로 그런 이유였다. 돈 있는 친구를 불러 술이라도 사면 벼락같이 화를 냈을 만큼 “어설픈 돈 자랑, 힘자랑을 싫어한다. 바른 결을 타고났다”고 했다. 고인의 삶을 한 단어로 응축한다면 그의 말처럼 ‘좋은 사람’ 아닐까.
▷1970년 서울대 미대 재학 중에 만든 노래 ‘아침이슬’이 군사정권 시절 광장의 노래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되고 고인은 정보 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가 다시 노래를 부른 건 생계를 위해 취업했던 피혁 공장의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서였다. 그가 노동자 합동결혼식의 축가로 만든 곡이 ‘상록수’다. 현실을 노래할수록 그는 시대의 한가운데로 소환돼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1970, 80년대 저항의 상징이었지만 그는 정작 “제 노래를 싫어한다”며 부르지 않았다. 음악을 사랑한 젊은 날, 음악으로 시려웠던 젊은 날. 그 시절에 대한 애증이 묻어난다.
▷1991년 ‘저항의 상징’이라는 틀을 깨고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며 연출가로 변신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공연되는 29년 동안 국내 창작뮤지컬 시장이 성장했고, 현재 영화계 주역인 배우들이 배출됐다. 배우들과 투명하게 수익을 나누는 등 공연계의 악습도 바꿔 나갔다. “소극장은 농사로 치면 못자리 농사”라더니 고인은 걸출한 농사꾼이었다. 그가 33년간 고집스레 지켜 온 학전은 지금 만개한 우리 문화예술의 못자리였다. “내가 뭐라고 이름을 남기겠나”라고 했지만 빈소에는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다며 흐느끼는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월 문을 닫은 학전 경영이 어려워진 건 2004년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수익이 되지 않는 어린이 공연을 꾸준히 올렸던 때문도 있다. 아이들이 웃는 모습이 좋다며 자주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고인은 야학에서 달동네 아이들을, 공장에서 어린 노동자를 가르칠 적부터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해 왔다. 민중가요 가수와 어린이극 연출자, 평생 자신보다 타인의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고인이었기에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을 것이다.
▷때론 가혹했을 세상에 고인이 남긴 마지막 말은 “그저 고맙다”였다고 한다. 배우들을 향해 “나는 뒷것, 너네들은 앞것”이라며 빛나기를 거부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가지고 뭘 안 해도 된다”며 뒷것을 자처했고 가족과 지인에게는 “고맙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는 말을 남겼다. 김민기. 향년 73세. 좋은 사람으로 살았기에 고단했을 그의 평안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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