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던 2002년 6월, 검찰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삼남 홍걸 씨를 알선수재 등 혐의로 구속한 것이 블과 한 달 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발밑이 꺼지는 느낌이었다”고 썼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남 홍업 씨가 금품을 받은 혐의가 포착됐다.
검찰 내에서는 홍업 씨 구속영장 청구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대통령실이 법무부에 선처를 요구했다는 얘기도 돌았다. 하지만 결국 홍업 씨는 구속됐다. 이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법무부 장관이 물러났다.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싸워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줄 수는 없다)’이라는 퇴임사를 남긴 채.
이 사건뿐 아니라 그동안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에는 어김없이 검찰이 등장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을 구속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여야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해 대통령의 측근을 포함한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대거 기소했다. 어떤 배경에서 수사가 비롯됐든 검찰이 최전선에 서서 권력에 칼을 들이댔던 것은 사실이다. 검찰은 지금도 ‘거악 척결’을 자부심으로 삼고 있고, 검찰에 수사권이 필요하다는 핵심 근거로 제시한다.
‘성역’ 보여준 검찰의 김건희 여사 조사
그런데 요즘 검찰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검찰이 여권 주요 인사를 수사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범과 ‘검수완박’법 시행 탓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여전히 검찰이 야당의 거물급 인사들에 대해선 활발하게 수사하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야당 인사들의 위법 행위가 드러난다면 몇 명이 됐든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외형상 공정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다.
이번에 김건희 여사를 조사하면서 ‘대통령 부인이라도 예외는 없다’라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검찰이 편파적이라는 비판은 한층 수그러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중앙지검의 선택은 ‘검찰총장 몰래 출장 조사’였다.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해 총장의 수사지휘권이 배제돼 있어서 조사한다는 사실조차 보고할 수 없었다는 것도, 경호와 안전 문제 때문에 검찰청사가 아닌 대통령 경호처 부속청사로 가서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조사 대상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검찰이 그렇게 했겠나.
서울중앙지검 지휘부 전면 교체에 이어 김 여사 조사를 지켜본 이들은 ‘성역’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검찰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든 국민의 신뢰를 받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지금의 검찰에는 뼈아픈 일이다. 거대 야당에서 검찰이 직접수사를 일절 못하도록 하는 ‘검수완박 시즌2’를 준비하고 있는 시점이다. 검찰이 믿을 것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여당 의원들이 재의결에서 부결시키는 것뿐인데, 민심의 동향이 중요하다.
‘검수완박 시즌2’ 앞두고 민심 잃어서야
재작년 검수완박법 진행 과정을 되돌아보자. 당초 민주당은 검찰의 직접수사권을 완전히 폐지하려고 했다가 여야 협상 과정에서 ‘부패, 경제범죄 등’에 대한 수사권은 남겨뒀다.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가졌음에도 한발 물러선 셈인데, 검찰 수사권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런데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 움츠러드는 모습이 반복된다면 검찰의 수사권을 옹호하는 여론은 힘을 잃게 된다. 야당은 부담 없이 법안을 밀어붙일 수 있고, 여당 내에선 ‘반란표’가 나올 여지가 커진다. 기존의 검찰은 사실상 문을 닫고 공소청으로 바뀌는, 검찰로서는 악몽 같은 일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검찰 스스로 그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自問)해보길 바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