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상속세는 사망자가 남긴 모든 재산을 합산해서 과세한다. 일괄공제액을 5억 원으로 정한 건 1997년이다. 당시 서울 도심 84㎡(전용면적 기준) 아파트 가격이 1억 원대 중반이었다. 아파트 3채 정도는 세금 부담 없이 가족에게 물려주라는 취지에서 정해진 금액이다. 그런데 근래 몇 년 새 서울 아파트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살던 집 팔아 상속세를 내야 하는 가정이 적잖다.
세대 간 부의 이전, 청년 세대에 마중물 역할
최근 정부가 상속세 감면을 포함한 세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물가 인상을 반영하고 조세 체계를 합리화하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일찌감치 ‘중산층도 상속세 걱정할 시대 왔다’는 기사를 썼던 입장에서 반갑게 느껴진다.
예상 밖이었던 점은 일괄공제가 아닌 자녀공제를 현행 5000만 원에서 5억 원으로 올린 대목이다. 조만간 상속을 해야 할 80, 90대 세대로서는 자녀가 많으니 혜택이 기대된다. 하지만 앞으로 상속을 준비해야 하는 50, 60대 세대로서는 자녀 수가 확 줄어 큰 도움 안 된다. 국회 통과라는 절차도 남아 있어 아직 먼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자녀공제를 늘린 데는 저출산 시대에 출산 장려의 메시지도 담았다는 설명이 나온다. 정말 출산율을 걱정하고 경제활성화를 도모했다면, 사망 뒤 상속이 아니라 살아생전 다음 세대로 부의 이전을 돕는 증여세 감면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실제 출산할 연령대는 20, 30대 세대이고, 이들에게 정부가 추진하는 상속세 공제 혜택은 너무 먼 얘기일 수 있어서다.
요즘은 ‘재산은 죽기 직전까지 움켜쥐고 있으라’는 말을 신봉하는 어르신이 적지 않다. 자녀에게 미리 재산을 넘겨주면 불효를 부추긴다는 말도 나온다. 그때마다 ‘저분은 자녀 대신 국가에 재산을 헌납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안대로 상속세는 줄이고, 증여세는 그대로라면 자녀가 많은 고령자일수록 증여를 미루는 게 절세전략에 맞는다.
한국보다 15∼20년가량 고령화에서 앞선 일본은 정반대 정책을 펼쳤다. 80, 90대 부모가 사망하면 60, 70대 자녀가 상속을 받는 ‘노노(老老) 상속’으로, 부의 잠김 현상이 사회 문제가 됐기 때문. 고령자의 막대한 부가 소비나 재투자로 이어지지 못한 채 예금 형태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3년 생전증여제도를 확대했다. 60세 이상 부모가 18세 이상 자녀나 손자녀에게 증여하면 주택구입비 500만∼1000만 엔, 손주 교육비 1500만 엔, 결혼육아비 1000만 엔을 비과세하는 특례를 한시 도입했다. 노인 세대의 자산을 청장년층으로 옮겨줘 소비를 진작하고 돈이 돌게 한 것이다.
이에 앞서 2001년부터 1인당(수증자 기준) 연간 110만 엔까지의 증여는 과세하지 않는 ‘역년(曆年) 증여’ 제도를 도입해 상속세 부담을 줄이게 했다. 역년 증여에는 자녀와 손주는 물론이고, 타인에게 하는 기부도 포함했다. 이때 상속일 기준 3년 이내 역년 증여한 액수부터는 상속액에 합산되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올해부터 ‘7년 이내’로 늘렸다. ‘더 빠른’ 증여를 유도한 것이다.
“이중과세” vs “부의 대물림 조장”
자산 고령화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60세 이상 고령층 순자산은 3700조 원을 넘어 전체 자산의 40%에 육박한다. 더 큰 문제는 이 자산이 대부분 부동산에 잠겨 있다는 점이다. 건강한 부의 이전을 고민해야 할 이유다.
상속 증여세와 관련해 한쪽에선 이중과세 이슈가, 다른 한쪽에서는 ‘부자감세’라며 부의 세습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단골처럼 나온다.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라면 성실하게 일하고 저축하면서 자산을 불려 나가는 삶은 권장돼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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