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주-대구-전북-경북 등
지하 충전시설 지상 옮기거나 중단
정부 “모든 전기차 배터리 정보 공개”
인천 전기차 화재로 ‘전기차 포비아(공포증)’가 전국 지방자치단체로 옮겨붙고 있다. 상당수 광역자치단체는 청사 지하주차장의 전기차 충전시설을 폐쇄하거나 이전을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지침은 지자체 건축물 심의기준에 반영돼 민간으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13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대전, 광주, 대구, 전북, 경북 등 5개 광역자치단체가 인천 전기차 화재 이후 청사의 지하 충전시설을 정비하고 있다. 대전시는 청사 지하주차장 17개 충전기에 사용금지 안내문을 붙였다. 충전시설 22개 중 지하에 있는 17개 완속 충전기를 철거하고 지상에 급속 4개와 완속 9개 충전기를 설치할 예정이다. 광주시는 청사 지하의 5개 충전기를 모두 사용 중단하고 지상 이전을 논의 중이다. 전북도도 이달 안에 청사 지하 19개 충전기 중에 9개를 지상으로 옮기고 나머지도 순차 이전키로 했다. 경북도는 도청 내 전기차 주차시설과 충전소를 지상으로 유도하기로 결정했으며, 대구시는 충전소 전수조사 후 이전할 방침이다. 앞서 울산시와 세종시, 경남도 등은 지상 이전을 완료했다.
서울시도 신축 시설의 전기차 충전소를 원칙적으로 지상에 설치하도록 하는 ‘서울특별시 건축물 심의기준’ 개정을 10월까지 완료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민간 시설에서도 전기차의 지하 주차 및 충전이 금지되는 추세가 뒤따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전기차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처럼 인프라가 산업 발전에 핵심인 산업에선 정부나 지자체의 움직임이 기준이 돼 민간도 따라가는 성격이 크다”며 “2022년 충전기 설치 의무화 시행 이후 정부 정책을 이행해 온 상업시설이나 아파트는 상당한 비용을 쏟았기에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정부는 13일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모든 전기차의 배터리 정보를 제조사가 공개할 것을 권고했다.
대전, 광주, 경북, 대구, 전북 등 주요 광역자치단체가 청사 내 지하 전기차 충전소를 폐쇄하는 등 전기차 지상화 정책을 확대하자 전국 아파트나 대형 쇼핑몰 등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도심 주요 쇼핑몰은 지하 5, 6층까지 전기차 충전소를 설치한 사례가 많고, 법적으로 내년 1월까지 충전소를 설치해야 할 아파트는 공사를 중단해야 하나 혼란스럽다는 분위기다.
13일 서울 시내 한 아파트 관계자는 “지난달에 전기차 충전소를 짓자며 박수 끝에 의결했는데, 이대로 지어야 하느냐는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주요 전기차 충전 업계 관계자도 “전기차 충전소를 지상에 설치할 수 있는지 묻는 요구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전기차 화재 원인에 대한 명확한 규명 없이 과잉 규제로 확산돼 전기차 산업 전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전기차 지상으로”…‘포비아’ 확산
서울 성동구의 A아파트는 지난달 입주자대표회의를 열어 단지 내 전기차 충전시설을 설치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2022년 1월 시행된 친환경자동차법(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에 따라 내년 1월 27일까지 아파트 전체 공간의 100분의 2를 충전 및 주차 공간으로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 단지는 기준대로면 6대 규모로만 갖추면 되지만 이보다 더 늘어난 14대 규모로 지상 및 지하 공간에 설치하기로 했다. ‘전기차가 확산되는 트렌드에 맞추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달 초 인천 청라 아파트 전기차 화재 사건으로 분위기는 보름도 안 돼 확 바뀌었다. 주민들은 안전성을 고민해봐야 한다며 기존 결정 안건 철회를 요구했다. 한 주민은 “가뜩이나 전기차 화재로 불안한데 왜 지금 타이밍에 다른 곳보다 더 적극적으로 늘리려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전기차 소유주들도 혼란스럽다는 분위기다. 전기차 이용자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각 아파트 단지 등에서 전기차의 지하 주차장 진입을 막거나 지상 주차장 사용을 권고하고 있다는 사연이 이어지고 있다. 경기 부천의 한 아파트는 ‘많은 아파트에서 전기차의 지하 주차장 이용을 두고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전기차 소유주는 지상 충전 및 주차를 부탁한다’는 공고문을 붙였다. 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전기차 소유주 50대 주민은 “전기차에 대한 선입견으로 지하에 주차를 못 하게 한다면 이는 사유재산권 침해”라며 “아파트의 권고가 강제행위로 바뀐다면 행정소송도 고려할 것”이라고 성토했다.
● “인구 밀집 도심엔 지상 주차 어려워”
이미 지하에 전기차 충전시설을 구축한 대형 백화점이나 쇼핑몰, 오피스 빌딩 등도 정부 방침과 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친환경자동차법 및 시행령에 따르면 국가·지자체 등이 소유·관리하고 있는 시설은 지난해 1월까지, 쇼핑몰 등 공중이용시설은 올해 1월까지 전기차 충전시설을 설치해야 했다. 123층 롯데월드타워 주차장은 지하 4층까지, 더현대서울은 지하 6층까지 전기차 충전 시설을 구비해 놓은 상태다. 국내 한 산업정책 자문기관 관계자는 “인구가 밀집한 도심에서는 지상 주차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크다. 지하 주차 금지는 사실상 전기차를 타지 말라는 말과 같다”고 밝혔다.
법으로 전기차 충전시설 설치를 의무화하고 보조금을 늘리던 기존 ‘친환경차 촉진’ 기조에서 지하 주차 금지를 포함한 규제 일변도로 정책이 변화할 경우 침체와 성장의 변곡점에 서 있는 전기차 및 배터리 산업계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영주 경일대 소방방재학부 교수는 “청라 지하 주차장 화재의 원인은 스프링클러가 제때 작동하지 않았던 측면도 크다”며 “소방 설비를 갖추는 등 안전성 강화를 넘어 과잉 규제로 돌아선다면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 대전=김태영 기자 live@donga.com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전남혁 기자 forward@donga.com 박현익 기자 beepark@donga.com 김은지 기자 eun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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